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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Mar 10. 2021

감자사라다

감자덕분이다.가난해도 별문제없었다.

우리 때는 국민학교다. 요즈음 한 학년, 아니 전 학년의 수가 수십 명이 되지 않는다는 말.

우리 시절은 한 반에 최소 50명 이상 가끔은 오전반 오후반. 

국민학교 교육이라는 것은 의무교육이기도 했지만 의무적인 불평등을 경험하기도 하는 곳.

부모의 살뜰함으로 착한 학교생활을 했을 학생의 수보다는 몇천 원이 안 되는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반 뒤에서 두 손을 들고 서있어야 하는 경험을 한 이들이 더 많다. 가난이 두 손을 들게 한다. 를 가르쳐주신 건가.

나보다 키가 큰 여자애와 싸워서 둘이 같이 혼나는 게 아니라 나만 수업 끝나고 남아있고, 그 여자애의 엄마가 봉투를 건네주자 선생님의 책상 맨 마지막 서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봐야 했던 기억. 그러나 우리 엄마는 파출부를 나가 있으니 그 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손이라도 잘 들고 있어야 했다

4학년이 되고 4반으로 배정받은 나는 도서부에 가입했다. 당시 명일 국민학교에는 별도의 도서관이 없었고

4학년 교실 중에 공간이 유난히 큰 4반에 철제 책장 열 칸 정도를 비치하고 책을 보게 했다. 도서부라고 해서 대단한 사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 오후 바닥에 왁스칠을 할 때 도서부는 찾아보기표로 번호를 붙인 책들을 숫자 순서대로 재배치하는 것. 


4학년 4반의 담임은 새로 온 선생님이었다. 지금 쓸 수 있는 어휘로는 초임교사. 24살의 여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이야 한두 살 차이는 있겠지만 대학교를 마치고 바로 온 것은 기억한다. 입이 호탕하게 크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를 지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어시간이었을 것이다. 비가 오니까 창쪽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집중력은 매우 떨어진 상태였다. 아이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낡은 학교 건물 탓에 창가 언저리는 한여름에도 비가 오면 냉기가 돌았다. 아이들 탓이 아니다. 선생님은 수업 중간에 장기자랑? 같은 시간을 만들었다. 갑자기 번호를 호명하면 장기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수업은 집중이 안될터. 아이들은 시간을 때워야 집에 갈 수 있었으니 뭐라도 하는 것 중에 노는 것도 유효한 일이다.  다른 반하고 비교하면 또 다른 분위기의 일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을 먹게 되면 '학기초부터' 아이들이 둥그렇게 앉아서 서로 도시락 반찬도 자유롭게 놓고 밥을 먹도록 지시했던 기억이다. 물론 선생님의 지시였으니 강제였고 , 서로 숫기 없는 아이들이 학기초부터 밥자리의 낯 섬을 서걱서걱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노래를 하나 가르쳤다. 제목은 기억 안 나고 , 머 대충 식사의 노래라고 하자. 가사 앞절은 기억난다.

"식사시간 다됐다. 맛있게 먹자~"로 시작하는 노래. 반찬이 소시지인 아이들도 있고 , 군내 나는 김치를 빨아서 볶아온 아이도 있고, 덴뿌라를 가져온 아이도 있고. 머 섞이니 그럭저럭 먹을만한 식탁이다. 싸주는 엄마들은 자기 아이만 먹이고 싶었겠지만 선생님이 살뜰하게 나누어 먹였다. 도시락을 못싸오는 시절이라고 말하면 진위여부에 토를 달겠지만 실제로 도시락을 못싸오는 아이들도 두세명 있었다. 나이가 너무 많은 할머니하고 사는 아이. 누나하고 둘이 사는 아이. 등등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 선생님은 아이들을 숨기지 않았다. 반에서 구김살도 없고 웃기는 것도 좋아하는 '좀 사는 집' 아이들 몇에게 도시락 한 개씩 더 부탁한다고 했고, 별로 티 안 나게 싸온 아이들은 좋은 반찬이 티도 못 내게 책상 위에 마구 섞어 다들 한 끼 재미있게 챙겼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고 비겁한 선생님인데 참 훌륭한 선생님이다.


여름이 지나고 학교에서는 상을 주겠다며 아이들에게 '그동안 읽은 책' 이름을 적어서 내라고 했다. 많이 읽은 아이에겐 상장 한 장이 주어지는 것이다. 책 제목을 지금 와서 기억해봐야 잘 기억나겠는가. 많이 읽은 아이도 정확한 제목을 외울 수는 없을터. 도서부인 나에게는 사실 쉬운 일이고 기회였다. 제목을 꼼꼼히 써나갔다.

나는 여름방학 전까지 220권을 읽은 아이가 되어 있었다. 거짓말 같은 내용이다. 솔직히 백 프로 읽지는 않았다. 그러나 매일 집에 갈 때 두 권씩 대여 명부에 책을 적고 집에 가서 다음날 반납하는 것을 보던 선생님이 보기에는 거짓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애매했다.  집에 가서 다 읽었냐고? 어려운 책을 빼고는 다 읽었던 것 같다. 

동기부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책이라도 열심히 읽는 아이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침 등교하는 길 , 밭을 넘어서 새로 지은 신축빌라에 살고 있던 선생님 집에 들러 벨을 누르고 선생님과 같이 등교하던 아이는 그 짧은 시간에 선생님이 책 내용을 물어보는 것을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어왔던 것이다.  고마움 때문이고 ,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4반은 돌아가면서 간식을 싸오면 한 분단의 네 명씩 짝을 지어 간식을 나눠먹는 시간이 있었다. 가발공장에서 일하고 가끔 귀걸이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자세하게 '폼나는 간식'을 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는 내가 식빵을 구워 싸들고 갔다. 물론 곁눈질로 본 토스트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빵은 다 타버렸고 설탕만 진득거리고 있었다. 두 번째 간식은 감자를 삶아갔다. 엄마는 무엇을 만들어 오라고 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말을 안 했으니. 그저 삶은 감자를 빈 통에 넣어주고 설탕을 따로 싸주었다. 그나마 감자는 제 모양대로 있지를 못했다. 어떤 놈은 깨지고 어떤 놈은 눌려서 뚜껑에 붙어있고 말이다. 선생님은 내 간식 통을 교탁 옆 선생님 자리로 가져갔다. 잠시 후 정성스럽게 으깨진 감자가 통에 그럭저럭 이쁘게 모양이 잡혀서 자리로 왔다. 내가 가져왔는데 이게 무엇인지 몰랐다. "감자 사라다네 "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아이들은 수저를 들고 맛있게 먹었다. 삶은 감자를 잘 으깨서 설탕이 보이지 않게 잘 섞어주면 포슬포슬한 맛은 없지만 그럭저럭 차진 맛의 가짜 사라다가 나온다. 아마 어린 선생님도 알고 만든 것은 아닐 듯싶다. 그 이후에도 눈치 없는 나는 감자를 대충 삶아 아침 일찍 선생님 댁에 들려 "저 오늘도 감자 싸왔어요"라고 말했다. 솜씨가 좋아진 선생님은 출근 전 부엌에서 몇 가지 재료를 더 넣어 정말 근사한 감자 샐러드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나는 3학년 즈음 학습 지진아로 분류되어 나머지 공부를 하던 수준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선생님 덕분인가.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함인가. 나머지 공부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고, 4학년에서 두 명에게 주는 다독상을 받게 되었다. 감자 샐러드, 아니 감자 사라다 덕분이다.

나는 발달이 더딘 편이었고, 누구에게도 물어보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4학년 그때처럼 보내지 못했다면 추측 건데 , 내 이름 쓰는 것 이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창가에 앉은 아이라서 추위에 약했으니 말이다. 사소한 것에 매료되어 사소하지 않게 , 제법 두껍게 사는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면 , 몇 안 되는 그 경우 중 하나, 4학년 때 감자 샐러드가 생각난다.


좋은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뵐 생각도 안 했다니, 이렇게도 이기적이다. 성함도 기억 못 하는데. 아마 여전히 건강하실듯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국민학교 4학년인 나보다 겨우 열몇 살 많았다. 선생님 나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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