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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Mar 09. 2021

냄새를 맡지 못하면 사이코패스잖아

그 냄새 언제 나를 스쳐갔지?


사람에게 나는 냄새 중 가장 고약한 냄새가 있다. 물론 개인적인 선택이니 누구를 특정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를 피우고 난 후 믹스커피를 마신 중년 이후의 남자에게서 나는 군내. 차라리 임진강 하구에서 그물에 걸려 죽은 향어의 사체 냄새가 좀 더 숨쉬기 좋은 냄새다. 임진강 향어는 최소한 거름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데 아직 죽지도 않은 중년 남자의 군내는 참을 수가 없다. 은퇴를 앞둔 공무원. 겨우 망해가고 있는 혹은 망해버린 중소기업에서 이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월급 수령자. 한때는 통일운동에 복무했으나 자식새끼는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한다는 부르주아지 적 변절을 선택한 몇 기수 위의 선배.

모두 다 내가 보기에는 사회 잉여들이다. 필요 없어서 잉여가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으니 얼굴에서 나오는 체취를 용서할 수 없는 군내 때문에 내 리스트에서 빼야 할 잉여라는 말이다. 보리수나무 아래의 부처님 말씀 같은  향내를 맡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할지언정 , 잉여의 숨 냄새를 맡을 만큼 내 남은 기대수명이 길지 않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좀 더 단호하게 군내를 거절하기로 한다.

냄새 맡음이 중요한 이유 그 첫 번째다.


사람을 재단하고 거리를 둔다. 이렇게 된 건 얼마 전부터 먹은 혈압 강하제의 부작용은 아닐 터. 그러나  그 약의 부작용은 매우 훌륭했다. "공연 시 무대에서 놀라거나 두근거림을 막을 수 있는 " 효과로 처방된다는 약. 약을 먹게 되면 지독하게 차분해지고 타인에 대한 감정선이 단순해진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라는 소시민적 분노와 정의감에서  해방되어 ' 머 그럴 수도 있지. 저래 살다 죽는 거 내가 간섭해봤자 뭐해'라는 식으로 바뀌는 정도?  아 아니다. 나도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는 중년의 타이틀을 수행함에 모자람이 없다. 눈물이 많고 애정이 쏟아지는 것. 어쩌면 감정선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쓸 수 있는 감정의 유한함을 알게 되어 아껴 쓰는 것이 아닐까.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모든 일에 분노하고 모든 일에 감복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최초에 인간을 세팅하실 때 기본 옵션으로 적용하셨던 "열 개의 달란트" 이론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감정과잉은 사실 소시오패스의 기만행위로 보이는 추세이니까.


냄새를 맡는다는 것. 그 기능으로 사람을 결정 , 평가 , 재단... 이건 예전부터 해온 것들이다. 사회화가 많이 되어서 안 하는 행위일 뿐이지. 새로운 개체를 만나면 뒤를 탐하며 냄새부터 맡는 것이 동물들에게는  피아식별이 빠른 방법이었다. 냄새는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분해주고 , 내 기억과 네 기억을 구분해준다. 동물일 때부터 까먹지 않고 유전되어 내려온 생존전략이다. 생존의 요소 중 하나인 관계. 사회관계 말이다. 그것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냄새로 기억하는 것이다. 소설에서는 꽤나 낭만적으로 나열되는데 현실에서도 그런가 싶다.


얼굴은 까먹어도 그 사람의 냄새는 기억하는 것. 낭만적으로 기술해보자. 매력적 경험이라고 예를 들면,

"담배 연기를 뿜을 때 플라스틱 같은 냄새가 나던 1인/ 공책에서 복숭아 향이 나던 사람" 등으로 나누면 먼가 운치 있겠다. 물론 플라스틱은 인간미가 없다는 뜻이고, 복숭아 향이라고 명명한 것은 청산가리 관련 내용을 읽다가 갑자기 이미지가 겹친 것이니까. 사실 낭만이 꼭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냄새가 공유되다 보니 그룹군이 생겼다. 나와 같은 냄새를 좋아하는 부류. 냄새를 쫓는 부류. 냄새가 같지 않으면 배척하는 부류. 빛이 많아 광공해로 눈이 멀어져 가서 그런가.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단순히 몰려다니면 그만인데 , 그 안에서 또 사회화가 진행되다 보니 공포 의식을 꼭 치르려 한다.

깃발을 들고 "내 입냄새가 더 독한데"를 설파해야 무리가 지어지고 치어리딩이 시작된다. 거기서 무엇을 얻어가는 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자. 나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공포와 분노를 팔아서 심신의 안정을 준다. 소속감을 준다. 얼마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생산적인가.  

불편한 냄새를 맡고 동시에 비슷한 분노를 쏟아내야 정상인 사회다. 공감하지 못하면 감정이 우선인 사회에서 배제된다. 물론 그런 사회가 왔을 리 만무하다. 물론 정치를 이분하고 피아식별을 해야 하고 혹여나 반동의 의사를 보였다가는 이쪽 진영에서 곧바로 배척되기 마련이다. 요즘은 그것을 입진보 코스프레라고 동시에 지식이 함몰된 인간이라는 등급을 받는다. 이럴 때는 냄새를 잘 맡는 척을 해야 한다. 마치 방언을 하지 못하는 교인이 교회 안에서 열심히 두 손 두 발 들고 가나다라를 거꾸로 외치면서 방언 코스프레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갸우뚱하게 쳐다보거나 분노의 타이밍을 놓친다면 그 지저분한 것 다음에 지저분한 것으로 찍히는 건 냄새를 미처 맡지 못한 내 차례다.

 그런데 어떡하지. 사실 나는 만성비염이라 냄새를 못 맡는데.

맡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대부분 분노는 두괄식이니 눈치껏 뒤에서부터 냄새 맡는 흉내를 내면 되겠다.

냄새를 맡지 못하면 사이코 패스가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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