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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Mar 26. 2021

신당동 진미떡볶이

영국 BBC에서 찍어간 걸 주인 할머니는 아실까?

34살. 남들 잔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는 기적의 귀를 가진 한민서, 내 이름이다.  수학과를 나와 과외를 하면서 멍청한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대가로 알차게 통장 기장 줄 수를 늘려 다세대 주택 하나를 엄마 명의로 만들어준 시대조류에 편승하는 재능꾼. 과외가 시들해진 몇 년 전부터 종로에 있는 보청기 회사에 덜컥 입사.  물론 덜컥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나이에 입사했다. 직원이라고는 총판 관리하는 이사님과 재무 담당하는 나. 둘밖에 없는 사무실이라 생기는 낭패들이 많다.그러나 이사의 게으름 덕분에 이 안에서 겪을법한 일들. 예를 들면 결제받으러 가까이 다가갔을 때 느껴지는 용도폐기 직전 중년의 체취. 그리고 가끔 저녁 약속을 위해 입은 원피스를 위아래로 흝어보는 실치 같은 눈.  다행이다. 오늘은 겪지 않아도 된다.  오늘은 효자들이 별로 없는 날이다.게으른 이사는 늦게 나오려나 했지만 아예 출근을 안했다. 매장으로 보청기 보러 오는 손님도 없는 목요일이다. 신기한 일이다. 월요일 , 효자들이 아직 재산이 남아있는 부모님들 모시고 보청기 투어를 올 만도 한데. 몇 년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 투어는 수요일 가장 호황이다. 아마 월요일 화요일 동안은 자식들의 견적이 오고 가는 시간인 듯하다. 하긴 보청기만큼 빈부의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효도선물도 없으니 말이다. 안경과는 다르다. 보청기는 일 이백 짜리 와 그 이상의 물건은 귀에서 울리는 "찡" 하는 소리가 다르니 말이다. 부모가 여즉 남겨놓은 건물이라도 있다면 삼백부터 시작. 분명한 건 건물의 높이에 따라 보청기의 값도 올라간다는 것이다.


종로의 저녁은 서울의 다른 곳보다 일찍 시작한다. 낮밤의 경계가 애매한 식당들의 메뉴도 이유가 되겠지만 종로부터 빠져나가야 서울 도심의 저녁 불이 켜지는 느낌이 든다. 오래된 곤로의 심지 같은 느낌? 기름에 절어있는데 생각보다 수명이 길다. 그을음도 많긴 하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것.  

친구들이 주로 불러내는 곳은 연고도 없는 강남대로 어딘가. 물론 약속 장소에 나오는 친구들 역시 강남에는 연고가 없다. 술 마시다가 몇 번 타박을 줘도 약속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 " 이년아. 너는 부천 살면서 왜 맨날 강남에서 술 마시 자고 불러? "

남 좋은 일 하러 가기에는 강남만큼 좋은 곳이 없다. 저번 주에 나온 소개팅 남자도 마찬가지. 기껏 불러낸 곳이 뱅뱅사거리 뒤편 초밥집. 사전 답사라도 해오신 건지 초밥 메뉴 말고도 서울투어 버스만큼 강남 명소에 대한 리뷰를 줄줄 읊어주시던데. 노력이 가상했다. 소개팅 주선자가 내 나이를 두 살 속이는 바람에 빌어먹을 '오빠'라는 호칭을 내심 기대하게 만들어버렸으니.


오늘 그 가짜 오빠를 또 만나기로 했다. 소개해준 친구의 입 발린 소리에 따르면 '오늘 저녁쯤이면 부모님께 소개하겠다는 결심을 토로할 것이고 , 미래를 약속할 재산공개가 이어질 것이다. "

호피 치마를 입고 나갔었는데 그 가짜 오빠 취향 유니크하다.


윤기 나는 접시에 담긴 저녁식사가 예상된 지금 , 시간은 오후 4시. 아무래도 저녁 접시를 기다릴 수는 없겠다. 접시 앞에서 꾸무럭하면서 내숭을 떨려면 이 시간 즈음에 달디 단 무언가를 먹어 놓는 것이 좋겠다.

유니크 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무실을 나와 택시를 타고 신당동으로 향한다. 내가 도착하는 곳은 충무아트홀 건너편 소방서 골목이 아니다. 이 골목은 '신당동 떡볶이 타운'이라고 오래전부터 불리는 곳. 떡볶이를 미친놈처럼 좋아하던 전 남자 친구 덕분에 국사 공부도 안 하던 내가 이 동네 역사를 외웠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독한 놈이었다. "오늘은 너를 위해 맛있는 떡볶이 집을 찾아왔어"라는 멘트가 어울리려면 중소기업 사장님 아들 정도는 돼서 가끔 하층민들이 먹는 음식을 찾아오는 것. 머 이 정도는 돼야 그 호러블 한 식도락에 박수를 보내주겠는데. 그놈은 진심이었다. 주머니 속에는 늘 떡볶이 정도만 사줄 수 있는 돈만 있었고 , 게다가 무려 당당하기까지 했다.  괴이한 추억 덕분에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역사는 남들보다 전문가가 되었다.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의 빗나간 탄생설화, 개천이 흐르던 신당동의 변화. 왜 신당동에 떡볶이집이 많아졌는가. 등등. 내 펀드 공부할 때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입했으니 그 미친놈이 의도한 바는 이룬 듯하다.


그놈. 아니 그 친구가 좋아하던 곳은 따로 있었다. 신당동 문화교회 앞 '진미떡볶이' 예전의 자리보다 두어 블록 내려왔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8년 전 , 신당동 산동네가 있을 때부터 있었다는 집이다. 그놈, 아니 그 아이는 이 동네 출신이었다. 떡볶이를 먹고 자랐다고 하니  머 근사한 추억으로 매번 데려오는 걸로 착각했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놈이었다. 추억이 아니라 그냥 지가 먹고 싶은 것이었다. 역사는 여기까지. 오늘은 나 혼자 왔다.

시커먼 국물에 담긴 얇은 떡 (예전에는 더 가늘었다고 한다. 요즘은 떡을 받아오는 곳이 바뀐 듯). 다디달면서 짜디 짠. 짜장맛 같으면서도 고추장 맛이 느껴지는. 반 그릇 먹고 나면 심한 당 충돌이 발생하지만 그 맛으로 먹고 나면 '아직 내가 이런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 젊네...'라는 말을 내뱉게 된다. 그리고... 이 국물. 간장을 맹물에 섞어 어묵을 넣고 끓인 국물에 후추를 섞은 맛.  처음 따라온 날이 기억난다. 전날 각자 술자리가 있었다가 오후 즈음 , 쾡한 모습으로 만나 해장을 위해 이곳으로 왔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 내 긴 머리의 반이 국물에 빠지는 것을 모르고 이 국물을 세 번 정도 리필해서 먹은 듯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간장을 물어 풀어 오뎅을 넣어 끓이고 후추를 친 그 맛이다. 건강을 해치는 맛인데 악마의 맛이다. 얼굴에서 나는 진땀으로 화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혼자니까 굳이 순대까지 시키지는 않았다. 떡볶이 한 냄비로 충분하다. 가격이 점점 오르고 있다는 블로그 글을 봤다. 아니 그놈이 읽어줬지.  그놈 왈 " 어릴 때 50원 내고 먹던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4000원 내는 건 물가상승률과 임금 획득에 따른 소비지수에서는 적절한 금액이야" 경제학과 나왔다는 놈이 지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른다. 다만 저런 말을 할 때는 말을 빨리하고 다른 주제로 빨리 말을 바꾼다.


반 정도 먹고 아쉬움을 남겼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가끔은 남은 것을 싸가서 찬밥을 비벼먹기도 하는데 머. 오늘은 강남으로 가야 하니까 신당동 떡볶이는 이 정도에서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당동 기분으로 강남 스시집에서 멀 먹겠는가. 또 머릿속에는 '간장 푼 물에 오뎅넣고 끓여서 후추 뿌린 맛' 이 생각나겠지.  


그놈의 말에 따르면 한 이십 년 전 떡볶이를 먹고 있을 때, 방송국 카메라를 들고 외국인들이 들어왔다고.

뒤이어 따라온 자그마한 한국 여자가 한국말을 잘 못하면서 옆의 통역에게 "이곳이 맞아요. 저 아주 어릴 때 먹던 떡볶이 집이에요" 라며 추억 찾는 프로그램 모양새를 보였고, 그 카메라에는 BBC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귀동냥을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릴 때 입양 갔던 신당동 출신 여자아이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피아니스트가 되어 한국으로 연주회를 하러 왔다'라는 스토리.  

그런 스토리를 나한테 들려주면 이 떡볶이 집에 자주 오는 원죄가 사라질 줄 알았나 보다. 참 멍청하다. 대부분의 남자들 중 이 놈은 심하다.   가만있자. 그때 나한테 했던 말이 "여기는 여자 친구만 데려오는 곳이야"라고 했던데.


나는 지하철을 타고 동대입구를 지나 압구정으로 가고 있다. 유니크한 그 소개팅 남자는 , 아 아니 오빠는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공부를 해왔을까. 남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보청기 회사 다니고 있어도 남의 말 안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할 말도 없는데 남 이야기가 들리겠는가.

그러고 보면 떡볶이만 미친 듯이 좋아하던 그놈은 신기하게도 자기가 말하는 재미없는 내용을 참 진지하게 길게 느리게 하루 종일 말했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다.  미래가 없어 보이는 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였는데 , 그래도 그렇지, 한 번도 (우리 둘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헤어질 때도 의무교육 졸업식 하듯이 무미건조했다. 우리끼리 만나면 불행해진다.  음... 이 말은 내가 했다.  다음 역이다. 오늘따라 사람이 많다. 강남이다.  ' 간장을 푼 물에 어묵을 넣어 끓이고 후추를 넣은 맛......'  지하철 공기에서 국물 냄새가 난다. 괜히 떡볶이를 먹었다. 소화가 안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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