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점심 저녁
지독한 치통에 시달린 적이 있다. 날짜도 하필 유쾌하게 추석명절. 지금은 명절 진료가 가능하거나 이렇게도 지독한 통증이 오기 전에 병원으로 도망치듯이 하겠지만 , 12살의 나는 무지했다. 물론 엄마의 잘못도 있다. 한 개에 십 원짜리 캐러멜을 그렇게도 좋아하더니 오른쪽 어금니가 썩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영구치가 나올 무렵 , 이 집 저 집을 돌며 며칠씩 살다 보니 이빨 하나도 봐주는 이가 없어 직접 실을 묶어 뽑아냈으니 말이다. 어금니가 영구히 나올 모양일 때, 딱딱한 것을 먹으면 안 된다느니, 혹은 자리를 잘 잡도록 치과를 데려갈 어른이 없었으니 옆으로 나오는 어금니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중에 엄마와 같이 살게 되었을 때 , 이미 이빨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어금니가 썩으면 일단 한쪽으로 씹는 습관이 생겨 굳이 비대칭이 되는 얼굴을 더 가혹하게 비대칭을 만든다. 밥이나 대충 삼키고 살면 되는 살림 형편이니 뭘 그런 것 까지.
당시 처음 가본 치과 , 아 아니 정정하자. 한옥집 안에 있는 치과용 의자 , 체어였다. 동대문 가기 전 신설동 어느 골목이었는데, 이곳에서 아주 싸게 어금니 치료를 받았다. 누워버린 어금니와 반대편 어금니. 세울 생각은 못하고 그냥 아말감으로 대충 때웠다. 덜덜 거리던 체어의 공포. 동시에 여러 곳을 찔러대던 드릴. "나는 앞으로 치과에 오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이 세워진 후였다. 정식으로 치료받지 못한 치아는 계속 통증을 일으켰지만 나는 "게보린"으로 버텼다. 추석 연휴라 어차피 문을 연 치과도 없었다. 처음에는 게보린 한알이면 반나절. 그리고 다음날은 여섯 시간 , 다음번에는 두 시간. 주머니에는 게보린 수십 알이 남아있었지만 이것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그 뒤의 일은 여차저차 해서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결국 게보린 중독으로 마취가 안 되는 상황까지 갔고, 그 상태에서 충치를 갈아내는 치료를 했으니, 영화에서 보던 '총알 빼는 람보의 패기'가 없던 아이는 비명도 안 나왔다. 그 기억 이후로 약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대충 식도를 넘기기 어려운 극한의 이물감을 느끼면서 자랐다. 공부할 때 먹는다는 '타이밍' 이라 불리던 약도 씹어먹었으니. 차라리 쓴맛이 알약의 이물감보다 경쾌했던 것 같다.
남들 다 가는 군대 , 남들 다 가는 시기에 가서 그냥 세월을 낭비했다. 기억에 남는 일도 없으니 없던 셈 쳐도 좋을 시기다. 군대에서 딱 한 가지 교정된 습관이 있다. 알약을 먹지 못하던 트라우마를 강제로 교정해주니 이 어찌 고맙지 아니한가. 말라리아가 창궐했다. "일부 지역에 우려가 있다" 정도가 아닌 말 그대로 창궐이었다. 98년 대홍수로 북한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최전방 서부전선 지역에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심지어 콜레라 주의까지 생겼으니. 말라리아는 감기처럼 발생했고, 더 이상 병사 각자의 위생문제가 아니었고 , 투약을 통한 예방 말고는 마구잽이로 생기는 후송환자의 발생을 막을 수 없었다. 한 번에 여섯 알. 쌀알보다 좀 큰 알약을 한번 여섯 알, 일주일 인가 이주일에 한 번씩 먹어야 예방할 수 있었다. 나도 재주껏 먹어봤다. 한알씩 , 물을 많이 마셔가며. 4개월 후 나는 제대를 했고, 두 달 만에 응급실에서 객혈을 하며 중환자실에 격리되고 말았다. 역학조사반이 다녀갔고 동아일보에서 취재를 왔다. "98년 말라리아 민간인 발병 1호"였다. 감기인 줄 알고 소주 두어 병으로 매일 이겨내려다가 혈액이 졸아버려서 더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한다. '더 큰일이 있어' 가족들도 모두 흩어져버린 후였고, 당장 하루의 일당으로 먹고살던 청춘에게 더 큰일이라는 것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 모두를 탈탈 털어 넣으니 병원비가 마련되었다. 퇴원하는 날 점심을 사주겠다며 과 동기 애심이가 왔다. 닭갈비집에서 낮술을 털어 넣었다. "앞으로 어떡할 거냐? 복학은 안 해?" 그 질문까지만 고마웠다. 내일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주머니에는 병원에서 챙겨준 알약 봉지가 바스락댔다.
하루만 살아도 다행인 이십 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열심히 며칠 살아보니 대충 하루만 남았다.
구질구질한 병원 스토리가 이어질 듯 하니 이후 이야기는 속도를 올려보자. 나는 나에게 늘 비겁했다. 그 비겁함은 결국 내 몸에 대한 학대로 이어지고 , 개화기 즈음 번민에 사로잡혔던 지식인의 병치레를 따라 하게 된다. 물론 그들은 시대를 고민하고, 민족을 고민하고 , 스러지는 자아에 대한 연민 등등 무언가 무게감이 있고 실존 가치가 있는 고민 끝에 몸에 홧기를 다스리지 못해 병을 얻었다면, 내 병은 초라하게도 선택 장애의 결과였다. 핑계를 만들지 못한 일에 대해 화를 낼곳 하나 없어지게 되자 , 술 담배를 정상적이지 못할 수준으로 접했다.
누구에게도 동정받지 못하는 짓을 하고 주변에 폐만 끼쳤다. 30대 나이에 결핵에 걸리고 색전증이 왔다. 몸은 이미 70대의 건강상태를 나타냈으며 , 나는 그래도 살겠다는 두려움인지, 미련인지 한 움큼의 약을 아침마다 먹게 된다. 약 먹기를 죽기보다 힘들어했던 자의 말로다. 결핵은 마치 도꼬마리 같은 균을 폐 깊이 숨겨놓은 느낌이다. 기침을 하다 보면 폐를 뒤집어 꺼내 먼지떨이로 마구 때려 털고 싶은 느낌이다. 그러니 그런 몸을 구하려는 약은 또 얼마나 독하겠는가. 게다가 알약의 개수도 많다. 약을 먹고 나면 끼니 걱정은 없다. 약으로 충분히 배가 부르니 말이다. 나른해지고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몸. 합법적이며 동의받은 게으름뱅이가 되는 것이다. 끼니마다 한 자루의 약을 챙겨 먹다 보니 주변의 시선도 살갑지는 않다. 아니 내가 주변을 보고 있는 것일 테지만. 오줌이 진해져서 피 색깔에 가깝게 되고 어디 나다니지도 못하는 주제에 술은 또 꾸역꾸역 마셔댔다. 재활은 다행히 성공했고, 한동안 나를 미워하는 짓을 멈췄다. 그러나 인생은 십 년 주기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한다고 하던가. 또 어리석게 인생을 허비했다. 낭비했고 학대했다.
결국 오늘도 나는 도시락을 싸고 있다. 맛있는 밥과 반찬인가? 아니다. 아침. 점심. 저녁. 잠들기 전. 네 칸으로 나뉜 아주 작은 반합에 하루치 약을 욱여넣는다. 캡슐 위치를 잘못 잡으면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어릴 적 엄마에게 생떼를 피면서 계란 프라이를 두 개 넣어달라고 했을 때 뚜껑을 비집고 노른자가 터져 흐르는 꼴을 상상하게 된다.
대저 근로를 충실히 하는 사회인들의 식사 중 점심이 가장 무게감 있고 정성이 가득한데, 이놈의 도시락은 점심이 가장 부실하다. 알약의 수가 가장 적어 먹어도 먹은 티가 안 나니 말이다. 아침이면 각성을 하라며 두꺼운 캡슐이 있고, 잠들기 전 쪽잠이라도 설치지 말고 자라고 한 줌을 넣어주는데 , 이상하게도 점심은 비루하다. 남들 앞에서 한 줌을 꺼내 털어 넣지 말라는 의사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래도 주변에 대신 폐를 끼치고 살아 약이라도 받아먹고 산다. 앞으로도 얼마나 폐를 끼쳐야 할지 가늠되지 않지만 , 그래도 꿋꿋하게 폐를 끼쳐볼 생각이다. 폐를 끼치는 와중에는 성실한 척을 하려 한다. 그러니까 저렇게 많은 알약의 도시락을 쌀 때 정성을 다해 오와 열을 맞춰 단정 시킨다. 폐를 끼치는 품이다. 살지 살아갈지 살려고 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던 성실한 척을 하려 한다. 폐 끼친 이들이 상처입지 않는 정도의 자조 섞인 목소리로 "저거 , 어쩌다 내 삶에 끼어들었누"라고 할 정도 까지만 말이다.
나는 그래도 폐 끼칠 사람이 있다. 사망한 이의 집 정리를 해준 수필 속에서 어디 한 곳 의지할 사람이 없어 책 몇 권만 남기고 자신과 이별한 사람의 아픈 사연에 비하면 나는 비루한 하루라고 투정 부릴 형편도 못된다.
몇 리 안 되는 둥그런 동선의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살기 위해 수십 장의 글을 써내고 삶에 집착하고 남의 삶까지 물어뜯으려 했던 절박한 김유정의 삶보다도 복 받은 삶이다. 물론 언젠가 지금보다 외로워지면 나도 김유정이 친구 필승에게 보낸 이 편지처럼 거짓 없이 엎드려 살려달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늘까지는 도시락을 쌀 수 있어서 , 시간은 좀 남았다.
필승 전.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하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 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엎짚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삼십 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 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 다오.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