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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밥 짓는 사람 Jul 31. 2021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 황교익 2021.7.  읽고 있는 중


노동자의 삶 중에 그나마 나은 삶이 있다면 식당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노동가치와 절대적 평가 같은 기계적 분석을 빼더라도, 식당에서 일하면 최소한 밥은 잘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시간만 돌아봐도 그렇다. 아르바이트와 정규직으로 고용된 일들 중 음식을 만드는 일이 가장 많은 경험을 차지했고, 일종의 업무상 과실이나 업무에 따른 스트레스가 가장 적었다.  레스토랑에서 돈가스 고기 치대는 법을 19살에 배우고, 군대에서도 취사병이 없는 소규모 부대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요리를 만들어 먹는 문화를 접했으니 말이다. 칭찬에 약하고 군대 권력에 쉽게 굴종하던 시절이라 상병 때까지 주특기 훈련보다 취사에 강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군대라는 곳은 경력을 부풀려야 인정을 받는 곳이다. “예! 저희 집은 치킨집으로 떼돈을 벌어 지금은 분당에서 무영쌈밥집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선임에게 어필하였는지, 나는 군대에서 배식 재료로 나오는 처연한 모습의 냉동닭을 갖고 마일드 양념치킨을 재연하는 기적을 보여줘야 했다. 양념치킨의 단맛은 그렇다 치고 , 땅콩이 있을 리 없으니 마늘을 튀겨 양념에 넣어 버무려 주었다. 덕분에 우리 부대의 부대원들은 훼바(FEBA)에 있을 때 먹던 멍청한 맛의 닭도리탕 대신에 양념치킨이라고 속인 닭튀김을 양껏 먹었다. 잘 생각해보면 구라가 판을 친 것이다. 치킨집 사장은 엄마였고, 나는 학생이었다. 곁눈질도 잘 안 해본 치킨 만드는 방법을 어찌 알았겠는가. 군대의 집단 이지메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스토리를 만들어야 했다. 냉동닭에게 나의 절박함을 설명하면서 “부디 네가 맛있는 치킨이 되어 주면 좋겠어”를 되뇌었던 것이다.

철가방을 든 적도 있으니 고급스러운 요리까지는 언감생심 이어도 , 채소 써는 칼질은 얼추 배웠을 것이고, 피자집에서 도우 반죽도 신나게 배우고 피자도 얻어먹고, 학교 앞 짝퉁 투다리를 주인에게 불하(?) 받아 직접 장사를 했다. 매출이 잘 나오던 비결로 선입선출해야 할 재료를 학생들에게 나눠 인심을 사는 “오병이어” 같은 기적을 행했다. 돌아보니 특별한 재주가 없고 꿈도 없었으나 살아야 했으니 항상 현재 스코어에 필요한 생활비를 충당하는 방법들이 식당일이었다.

물론 이런 기억들은 아주 특출 난 경험치가 되지는 못했고, 이십 대를 마무리하며 학교를 강제로 졸업당할 때 즈음에는 내가 경험한 이십 대의 단타 경력들은 아주 쓸모가 없었다. 토익 한번 안 보고 취업을 하려 했으니 철면피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이들과는 반대로 회사에 들어가서 새벽반 저녁반을 동시에 다니며 영어를 배워야 했다.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내 게으른 이십 대의 부채가 늦은 공부로 보복당하는 기분이었다. 음식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가끔 소식을 듣는 어머니는 남의 식당에서 “말이 좋아 주방장”인 생활을 하고 계셨고, 나의 음식은 전날 마신 소주로 긁힌 속을 다시 긁어내는 해장국을 찾는 생존 의지. 딱 그 정도였다. 내 급여는 한 달 내리 술을 마시는 용도였고, 이십 대처럼 배가 곯아서 음식일을 배우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삼십 대 중반에 호기롭게 시작한 백수생활은 묘한 중독성을 띄고 있었다. 한 달만 잘 버티고 , 남의 눈치만 잘 보면 다시 또 한 달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다만 누군가 “직업”을 물어볼 때 , 그때 지어야 하는 어색한 웃음이 잘 익혀지지 않았다.  직업까지는 아니고 “뭐”라도 해야 했다. 남들이 자꾸 물어보는데 “난 집에 있어”를 반복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황교익의 끼니 라는 제목이 붙은 강의를 듣게 된 것. 그때가 아마 2015년이었던가. 그다지 오래된 기억은 아니다.

다음 중 고르시오. “끼니를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음식 관련 종사자, 예비창업자, 음식문화 관련… 머 이런 예시가 실재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수강생들과 수다를 떨 때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 하기” 때 나온 내용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당 사항이 없는데 혼자 알아서 검색해서 찾아왔다. 매번 강의 때마다 친구 하나 없이 (사실 그 강의는 둘 또는 셋 정도 혹은 그 이상 교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혼자 온 사람 중 날 백수는 나 하나였다.) 맨 앞에 앉아서 무거운 노트북을 켜고, 핸드폰으로 녹음을 동시에 하면서 강의자의 말을 전부 타자로 치는 무식한 짓을 하고 있으니 사실 주최 측에서도 좀 과한 사람으로 보였을 수 있다.  물론 나는 불성실하다. 그때 그렇게도 몰두한 것은 “백수였다가 움직이니까 과한 몸짓이 나온” 머 그 정도. 딱 그 정도였다. 게다가 수강료가 비싸서 머라도 줏어가야 한다는 보상심리도 같이 작동한 듯하다.

저 과정을 수강했다고 해서 맛 칼럼리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농원 사파리 투어 했다고 다음날부터  베어그릴스와 같이 겸상하면서 뱀 잡으러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티비에 나오는 황교익 선생님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당시 유행하던 건다운이니 하는 맛 블로거들의 “전봇대 붙잡고 MSG” 같은 퍼포먼스가 너무 역해서 반대급부로 “음식 이야기”를 진짜 들어보고 싶었던 것. 딱 거기까지였다. 그러니까 맛집 블로거들에 대한 혐오가 내돈내공 을 하게 만든 것이다. 백수 때니까 뭐라도 해야 했다는 것이다.  

황교익 선생님 어떻게 처음 알게 되었나요. 의 대단한 스토리였다. 인터넷에서 본 강의 안내서 보고 찾아가서 강의 듣고  나중에 뒤풀이에서 인사 한번 한 게 끝.  

너무 부실한가. 굳이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는 척을 할 정도의 스토리로는 말이다.

먹고사는 것을 남에게 평가받는 나이, 그 나이에 걸맞지 못하게 비루한 현실에서 헛배라도 부를 수 있으려고 폼 잡은 것. 덕분에 몇 주동안 출석할 곳이 있었으니  강의료는 그럭저럭 똔똔이었다.

책 후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무슨 첫사랑 분식집에서 어떻게 만났나요 같은 내용이 되어버렸다.  지독한 미러링이다. “나는 왜 음식에 천착하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황선생님의 다른 책들은 내용을 일부 인용하고 , 내 수다의 재료로 쓰이고, 말 타래를 엮는데 도움이 되었다면 , 이 책은 2015년 몇 개월을 생각나게 하고, 군생활을 생각나게 하고, 이십 대의 파편을 모아서 조립하게 만드는 시간을 주었다.  




시간은 또 몇 년이 흘러 어쩌다 보니 나는 음식장사를 하게 되었다.  되었다 라는 표현은 내가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역시 또 그렇듯이 “등 떠밀려” 살고 있다는 뜻이다.. 등 떠밀려 왔던지, 혹은 남의 등 밀면서 왔던지,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을 살고 있다. 잘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기록할만한 하루를 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내가  “어떻게(든) 먹고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재주가 없으니 시간이라도 악착같이 붙잡고 끌려가면서 살 것이다.   살아지던, 살던 그건 중요치 않다.



p.s맛 칼럼니스트는 애즈 녁에 꿈을 버렸다. 아니 사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굳이 사족으로 남긴다. 나는 황교익 선생님처럼 부지런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미 그 시장은 포화상태다. 레드오션을 넘어 꽉 차있다. 결정적으로 안 되는 이유. 나는 글을 못쓴다. 글 못쓰는 칼럼니스트가 어디 있는가. (매력적인 직업이긴 하다.)


p.s  나중에 혹여 운이 좋아 기회가 된다면 황교익 선생님과 라디오 방송에서 만나보고 싶다. 그러려면 내 체급을 올려야 하는데 방법은 딱 하나다. 식당이 잘되면 어떻게라도 되지 않을까. 물론 상상에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상상은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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