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 넘어 변산
여름은 늘 그렇다. 화나 있는 상태의 아름다운 여자의 뒷모습 같다. 뜨거워서 지치게 하고 어느 날은 습한 날이 여러 날 반복되어 눈치를 보게 되고 쌓이고 쌓인 낮은 기압이 터지는 날은 장마와 태풍이 내려온다.
태풍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계획 없이 떠나자고 한 것은 맞지만 말이다. 그저 조용히 따라온 여자에게 나는 음악도 틀지 못하게 하고 내 맘대로 서해안 고속도를 탔다. 어디로 갈 것인가도 생각지 않았던 여행이다. 여자는 무책임함에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직장에서의 일조차 사근사근하게 들어주지 않는 남자에게 서운할 예정이다.
이 남자 또 자기 멋대로다. 그 흔한 검색도 하지 않더니 서천을 지날 무렵 여자에게 한마디 한다. " 군산 가서 점심을 먹을 거야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고 들었어" 여자는 늘 그렇듯이 남자의 불성실한 배려에 고개만 살짝 흔든다.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도 한 번쯤은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닐까 하는 표시지만 이 남자... 그런 걸 알리 만무하다. 육체적으로는 작고 비루한 주제에 성격은 파산 직전의 참봉 집 장남 같은 근성만 있다.
군산을 서로 알리 없었다. 무슨 곤조인지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는 남자.
"난 네비를 태어나서 본 적이 없어. 운전의 기본이 안 돼있는 거야. 지도를 읽을 줄 모른다는 건 " 그래 너 잘났다. 여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을 하지만 여전히 조소가 입 안에서 맴돈다.
군산 , 그 유명한 집을 돌고 돌아 찾았다. 반대편 차선에서 가게를 바라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국에 있는 모든 곤조들이 여기로 모여있나 보다. 저기서 줄 서서 밥 먹으려면 해질 때쯤 될듯하다. 남자는 이럴 때 포기가 빠르다. "난 줄 서서 밥 먹는 건 절대 못해" 못하는 건 왜 저리 많은가. 왕의 세자로 태어나도 궁중의 예를 갖추어 살 텐데 저 남자는 어디 부족의 왕도 아니면서 맨날 "난 못해!"가 입에 배어있다.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남자는 지도를 안 보고 멀리 어딘가를 응시한다. 망망대해도 아니고 군산 시내 한복판에서 돛을 타고 망루에 올라 육지를 찾는 것인가. 저런 남자가 배를 탔으면 진즉에 유령선 되어버려서 바다를 헤멜 텐데. 여자는 속마음을 입안에서 도로로로 굴리는 재주가 생겼다. 침이 고이면 그냥 삼키는. 남자는 엄한 해안도로를 달린다. 이미 식사시간은 지났다. 여자가 식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남자에게 행운인지 저 눈먼 항해사는 알까.
방조제라는 표지판을 타면서 남자가 말한다." 우리는 이제 변산반도로 갈 거야. 거기 내가 예전에 농활을 와서... 블라블라..." 농활 여기로 두 번만 더 왔으면 지역에 출마라도 했겠다. 저 이야기의 끝도 기억한다. 본인이 트럭 밑에서 술 취해 잠들었다고. 유치한 객기를 이야기하는 남자들은 유치가 빠진 지 한참은 되었을 텐데도 유취를 거둘 수 없나 보다. 그래서 남자들은 늙어서 혼자 살면 흉하고 여자는 그럭저럭 산다는 말을 하나보다.
방조제는 드라이브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드라이브 코스로는.
식사하러 가기에는 좀 부적합했다. 여자는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그냥 가도 아직 한참을 갈 것 같은데 남자는 또 유치한 말을 건네면서 창문을 연다. " 공기가 좋지 않나? 서해안에서 이 정도로 맑은 공기가 어디 있어." 그다음 말은 창문을 열어서 인지 잘 안 들린다. 고맙네. 밥 먹으러 가는 거지 공기 마시러 왔냐. 다시 여자는 되새김질을 한다. 도로로로.
변산반도에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날씨가 어두워졌다. 아직 해질 시간은 아닌데 말이다. 날씨 정보를 보니 변산반도는 태풍 영향권에 들어있다고 한다. 군산까지는 그냥 추적스러운 날씨였는데 말이다.
바로 식당에 가지 않는다. 변산반도를 보겠다고 한다. 여자의 속에서 순간 울컥하는 것이 올라왔다. 평소에 술도 잘 안 마시는데 먼가 올라오는 걸 보니 "역류성 식도염"은 아닌듯하다. 그냥 화병 같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신난듯하다. 차에 우비를 미리 챙겨놨단다. 장하다. 부모님이 칭찬하시겠네. 우비를 쓰고 다가간 해수욕장이다. 채석강이라는 곳을 가시겠단다. 여자는 묵묵히 따라갔다. 해수욕장 앞에서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다. 싸구려 우비는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다. 그냥 물에 빠지는 게 나을듯하다. 해수욕장 근처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온다."현재 변산 해수욕장에는 태풍 경보가 발효되었습니다.. 해안가에 있으신 분들은 서둘러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망가지려면 이렇게 스토리가 단단해야 사람들이 '픽션'이라고 여자를 위로할 것이다. 차로 돌아왔다. 남자는 그제야 핸드폰을 들고 어딘가를 검색하려 한다. 여자는 날씨가 자기와 같음을 느꼈다. " 저기요. 그냥 아무 데나 좀 들어가요. 이 날씨에 뭐하는 짓이에요? 아니면 나는 그냥 터미널에 내려줘요. " 남자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조용히 (처음이다. 시동을 걸면서 허세를 안 떠는 건) 차를 몰았다. 잠시 내린 남자는 근처 슈퍼로 뛰어가서 금세 돌아온다. 담배도 안 피우는 사람이 왜 잠깐 슈퍼에 갔는지 여자는 전혀 궁금하지 않다. 말을 하기도 싫다. 남자가 말한다"여기서... 십 분만 후딱 가면 밥 먹을 곳이 있데... 금방 갈게...." 와이퍼를 아무리 세게 해도 유리는 잘 안 보인다. 여자도 지금 상황이 안 보인다. 날씨 같다.
곰소염전이다. 비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염전에는 사람이 없다. 젓갈을 파는 가게들도 한산하거나 문을 닫고 오늘은 한가롭기를 선택했나 보다.
가까스로 문을 연 식당을 찾았다. 이미 몸은 젖은 신문지 같이 여기저기가 찢어지는 불쾌한 느낌이다. 식당 안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젖은 채로 들어선 손님에게 미처 장사를 준비하지 않았던 식당집 딸은 그나마 구석에 앉기 좋은 자리를 청한다. 남자는 조용했고 여자는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둘에게 놓인 한상은 젓갈정식이다. 흰 종이 위로 대부분 붉은색의 곰소젓갈. 그리고 맑은 백합으로 끓여진 백합탕. 국물은 맑았고 젖은 두 사람도 조금씩 말라갔다. 젓갈은 짜다. 그러나 하루 종일 비에 젖고 폭풍에 두들겨 맞은 두 사람에게 이 지독한 짠기가 위로가 된다.
맑은 백합탕은 몸을 말리고, 흰밥 위에 올려먹는 젓갈은 화해의 짠기다.
평소 식사를 적게 하던 여자도 공깃밥을 추가한다. 화해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한마디 건넨다. "우리 밥 먹고... 조금 기운 내서 여수 갈까?"
여자는 차라리 웃고 만다. 밖에 나오니 아까 같은 비는 멈추었다. 날씨만 흐릴 뿐이다. 진짜로 여수까지 갈 속셈이다. 아직 비가 다 멈추지는 않았다.
사실 여자는 젓갈을 싫어한다. 남자가 노력하는 게 딱해서 먹어봤다.
날씨가 개면 오늘 같은 젓갈의 맛은 기억 안 나겠지.
비 몰 아치는 날은 곰소염전에서 먹는 젓갈이 참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