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

오후 5시 "낮술 환영"

by 밥 짓는 사람

낮술은 집중할 곳이 많은 술집이 좋아. 채광 좋은 반지하 입구. 그 앞에 올려져 있는 저 오래된 카세트 데크도 좋고, 벽에 붙은 사진도 좋고.

손님에게 무심한 가게가 좋지. 이 시간에 술집 주방은 막 일어난 학생과 비슷해. 멀 주문해도 대충이야. 마음과 다르게.

이럴 때는 마른안주가 최상이고 최고의 대접이야. 낮시간 방해하러 온 사람. 무려 돈을 내고 말이지. 그럼 감정을 담아 북어포를 찢어서 대충 수습해서 건네어 주면 좋잖아. 반가운 척 안 해도 되고.

생맥주도 , 담는 잔도 얼추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


낮술이 좋은 건 , 하루를 나눠 쓸 수 있다는 것. 아까는 현실 도피의 이야기가 오고 간다면 이제는 서투른 이야기가 오고 가도 돼.

둘이 떠드는 소리는 주변 소리와 겹쳐. 맥주 따는 소리 , 꿀떡꿀떡 하며 술 따르는 소리 , 어쩜 신기하게도 술 따를 때는 내 술병의 무게에서 너에게 주고 남는 거래의 양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런 재주는 왜 대화에 적용되지 않을까. 쓸모도 없이 내뱉는 말이 너무 많은데. 물론 그렇게 막 내뱉은 말들이 그릇에 잘 담겨서 졸여질 때도 있지. 그 맛을 찾으려고 매번 썰어대는 중이기도 하고.


우리 같은 손님이 옆 테이블에도 있어. 우리 주파수 대역이 아니니까 훔쳐 들을 수는 없는데, 나와 대각선에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내 일행 아닌 사람의 말을 상상해. 물론 내 앞의 이야기가 지루한 탓도 있어. 머 매번 그 성공도 못하는 성공 스토리야. 전쟁통에 날아오는 삐라같잖아. 촌스럽고. 지기 확신적이고 메말라 있고. 신기하게도 이런 테이블이 많아. 떠드는 소리 같은데 다들 각각의 주파수가 있어. 나는 앞자리의 주파수를 맞춰놨고. 옆 테이블도 둘만의 주파수로 떠들어. 가끔 부족한 신호가 오면 , 잔을 채워 들거나 담배를 들어 같이 나가기도 해.


대각선 자리에서 들리던 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니 , 매력적이던 두 사람은 이 테이블을 떠나 소리가 안 들려.

집중력은 금세 닳아버려서 이제 그만 자리를 파하려 하는데 , 내 일행은 한잔 더 마시겠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연락을 돌리고 있네. 그곳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어. 마포 뒷길에 내려주고 보니 남겨놓은 저 즈음에서 아직 못한 말이 주파수에 걸려있어. 오늘은 이곳에서 스위치를 끄는 것으로 하자.


비록 술은 마시지 않지만, 한자리 차지하려고 메뉴판에서 탄산수를 찾아 주문해 놓고 있으니 얼추 괜찮네.

술집에 앉아 사람들과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를 켜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뭐. 물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주파수는 계속 빨라지거나 느려지면서 같은 공간에서도 시차는 생기겠지만 그래도 두세 시간 정도는 대화도 되고 하니까. 어차피 이 사람들도 서로 집중하지 않는 중인데. 너무 티 내지 말고 앞자리 말을 듣는척하면서 시선을 돌리면 , 가게 벽에도 있고. 길가는 사람들에게도 있고. 깡통 테이블 밑에 와서 등을 비비는 고양이에게도 주파수는 있을터. 내가 짧은 주파수를 던지면서 이야기를 건네 보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길게 이어진 주파수끼리는 오늘 외롭지 않을 것이고. 나는 여기 즈음에서 내 소리를 끄고 사라질 것이니까.

오늘의 소실점은 다섯 군데. 말을 남기고 왔어. 사람도 남기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해 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