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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May 02. 2023

미용실

내가 머리를 관리하는 습관

머리를 자르러 두 달에 한 번꼴로 나는 남자미용실에 간다. 구태여 ‘남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남자미용실’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사실 그 체인매장 자체가 남자손님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지만 매장의 규정상 여성고객의 출입이 제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여자 손님을 본 적은 없지만) 나는 그 미용실을 꽤나 오랫동안 다니고 있는데,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곳이 개업한 년도 이래로 추측하기론 나는 그곳에서 머리를 관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시작은 엄마 손잡고 다녔던 미용실이었다. 나의 의견 따위는 아랑곳없이(물론 어린 나이에 머리에 대한 의견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엄마가 지정한 대로 머리의 형태며 길이를 주문하고 미용사가 그 오더에 맞춰서 미용사가 상품을 정돈하는 방식이었다. 중학교까지는 티끌 없이 깔끔한 그 시스템에 익숙해서 미용실 하면 ‘엄마’라는 당연한 수식어로 나의 미용상태를 점검했다. 성장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엄습하기에 맞춰 나는 어느새인가부터 미용실에 혼자 가야 했으며, (아직도 혼자 간 미용실에서의 떨떠름하고 어색한 침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주문도 본인 스스로 해야 한다는 미련한 압박감에 현재도 내 마음의 부담감을 가늠할 정도이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화려한 다른 고객님들의 펌과 염색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을 중시하는 아파트 단지 내 그 미용실이 많은 여성고객들을 주로 한다는 점이었기에 왠지 이제 막 사춘기의 문턱을 나서는 또래의 남자아이 하나 없는 그 낯선 장소가 주인 잃은 가냘픈 강아지처럼 나의 존재자체를 동일시하기에 딱 알맞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결제를 하고 머리를 했고 그곳을 나섰는지 두근거리는 걱정의 기억과는 별도로 과정이 삭제된 상태로 나는 꽤 몇 년간 엄마와 매달 다녀 들었던 그 미용실을 오랫동안 혼자 다녔다. 습관이란 게 무섭고 인간이라는 게 익숙함의 본성이 강한 탓인지 나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고 나름의 기준으로 내 발언권을 갖는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으로 선택권을 넓혀왔다. 그 가운데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당당한 미용실(이발소를 가장한 멋들어진 아저씨들의 미용실)이 오픈하였고, 2차선 도로 너머 우리 단지 내에도 그 프랜차이즈 지점이 매장을 오픈하였다. 그 당시에는 꽤 스타일을 중시하는 혹은 그런 사람들이 오기를 바라는 타깃을 대상으로 매장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때문에 생각보다 일반 내가 다니던 미용실의 분위기와 딱히 다르지 않은 느낌에 어색함이 느껴지기는 마음은 여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단지 그곳의 독특한 콘셉트는 본인머리는 직접 감아야 한다는 점과 가격이 매우 싸다는 점이었다. 그 일관된 특성은 개업 이래로 한 번도 변경된 점이 없을 정도로 그 미용실이 가진 꽤 독특하고 강고한 신앙인데, 나는 이 두 가지 장점을 정말인지 너무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으로 인해 지금은 많이 올랐다) 개업이라는 오픈 특수로 습관적인 방문을 제하더라도 가볍고 빠르게 주문생산하는 시스템이 나에게는 적절했으며, 군더더기 없이 처리되는 간편함이 무엇보다도 매달 불편하게 처리해야 하는 과업이 금세 치워져 버리는 느낌이 나는 좋았다. 특히나 나는 그 당시에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누가 내 머리를 자르든 맘에 드는 느낌으로 결과가 나온 적은 없으므로 그냥 거의 방관식으로 내 머리를 처리했다. (꽤나 무서운 표현이지만 정말인지 그랬다) 내가 상상하는 머리 스타일링을 말로 적절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며 (나는 말하는 것보다 글로 적는 게 훨씬 편하다; 의사전달의 명확성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제외하더라도) 머리를 다듬어주시는 그때마다 달라지는 미용사들이 구사하는 화법과 내 머릿속에는 도통 서로 다른 개념으로 존재하는 결과물에 적응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 매장은 항상 백반집의 기본 메뉴에 들어가는 된장찌개, 김치찌개 마냥 상고스타일, 스포츠, 투블록(이건 좀 이후에 추가된 것 같다)과 같은 남자 모델 사진을 반짝반짝한 아크릴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해 벽에 박제해 두었다 (이곳을 나서면 당신은 이 모델 중 한 명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확신과 강한 의지를 포함해서) 나는 꽤 그 모델들의 변천사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는데, 그들은 때에 따라 매우 젊기도 한 결국엔 아저씨들이었으며 주변에서 찾아봄직한 남자들이었지만 그렇게 흔한 게 볼 수도 있지 않은 그 경계선 언저리에 있는 듯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손님들은 이분들처럼 될 수는 있겠으나 이분과 동일시는 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경고?) 그런 문제를 뒤로하고서 나는 매번 여자들의 미용실에서 주문하던 샤기컷(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단)을 집어던지고 고등학교의 스포츠 스타일을 벗어나(학교의 방침이 그러했다) 투블록에 안착했다. 상고머리나 스포츠라고 주문하면 미용사들이 기계 된 학습에 의해서 10분 안에 처리(실제로 이 이하로 걸리는 손님도 있다!) 해버릴 손님이라는 인식을 주기는 싫었고 투블록이라고 하면 그래도 1~2분은 추가해서 손가위정도는 사용해서 신경을 써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난 이곳에 왔지만 그래도 스타일을 중시합니다”라는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블록은 몇 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으며 수많은 아티스트 미용사들이 각각의 기준으로 투블록의 이미지를 실천했다. 그건 아마 우리가 한 단어에 내포한 의미를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와 비슷했는데, 정의는 한 음절로 끝날지언정 의미와 해석은 서로 가진 배경과 환경 기억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고 차이를 가진 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하지만 ‘투블록’은 ‘투블록’이었고 나는 어느새인가 그 스타일이 가지는 범위와 편차를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서로 다른 손길이 추구하는 방향과 기준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삼십 대가 되었다. 왜 갑자기 머리 하는 얘기로 글의 시작을 꺼내었는지 궁금해했다면, 글을 쓰는 시점으로 바로 어제 나는 그 미용실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누가 내 머리를 시술해도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난 늘 그 지점의 사장님이 맡아서 머리를 관리했다. 어제는 마침 그 사장님이 휴일인 관계로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보통 같으면 나는 그냥 다음에 온다고 하거나 이미 매장의 투명한 창을 엿보며 사장님의 존재를 파악한 후 들어가지 않았을 테지만, 어제는 웬일인지 그냥 무시하고 매장에 발을 옮겼다. 이게 오늘의 업보이겠거니 했던 것은 이전에 머리를 맡겨두었다가 꽤나 마음의 상흔을 받은 기억의 미용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그녀의 손이 그때 손님의 염색을 마친 후 나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지점은 항상 두 명의 미용사가 번갈아가면서 있는데, 이날은 생전 처음 보는 직원과 이전에 실패했던 미용사 두 명뿐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들어갈 것인가, 가느다란 실패를 과거로 잊고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할 것인지 말도 안 되는 두 가지의 선택지에서, 나는 매우 갈등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이미 나를 빙글빙글 360도 돌아가는 의자에 앉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매끄러운 전개와 스스럼없는 움직임에 나는 나를 포기한 채로 그 의자에 앉아 어서 이 공간을 벗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외침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보통 사장님한테 내가 머리를 맡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분은 말이 별로 없다. “어떻게 원하세요?”라는 질문 말고는 일절 말이 없다. 오히려 내가 불안해서 “요즘 많이 바쁘시죠?” 혹은 “요즘 손님은 어때요”라고 정말인지 INFJ이면 묻지 않을 사교성 높은 오지랖을 꺼내게 되는데, 그만큼 사장님은 냉혹하게 조용하시다. 나는 보통 “투블록으로 옆은 짧게 그리고 뒤에는 특히 많이 쳐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떤 코멘트도 없이 사장님은 이발기를 들고 머리 다듬기를 시작을 하시는데, 그 훌륭한 손놀림과 완성된 결과물에 나는 어떠한 이의 제기도 한 적이 없다. 너무 알아서 잘해주시니까 뒷말이 없기도 하지만 불편할지 신경 쓰일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모호한 선택으로 특별한 호불호의 경계를 건들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깔끔함이 맘에 드는 이유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과거 실패의 미용사는 달랐다. (나는 이 연유로 그동안의 편안함과 작별을 고하게 된다)  컷팅의 높이는 어떻게 할 것인지 머뭇거리는 손놀림과 이발기의 길이 모호한 태도는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결국 내가 어떤 식으로 해달라고 지정은 했지만 그녀는 여간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나를 의문시 삼았다. (이전에 스타일을 ‘투블록’으로 하지 않아 다듬은 머리 위치가 표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어 그녀가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미용사가 머리를 다듬는 동안 나는 이 문을 나서면서 그녀에게 따지는 상상을 했다. “사장님이 없어서 머리를 맡겼는데 괜히 했다”, “내일 다시 와서 사장님한테 보완을 요구해야겠다!”라는 내 행동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매우 귀찮았다. (심지어 두 달 만에 겨우 오는 이곳을 또 연속으로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찌어찌 마음의 타협점을 찾고 요구한 대로 머리를 다듬어주시는 미용사는 그런 내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는 가늠할 여지는 조금도 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작업을 마주하고 있었다. 손님이 어떻다는지, 이전 시술 기억을 하고 있었다는지 중간중간 추임새 넣어서 조잘조잘 말씀하지는 모습이 불편했던 나의 상상과는 조금은 미안하게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과연 마음 편히 내가 내 머리를 누구한테 내놓은 어색한 기억이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는 않나) 결과의 머리는 아직도 어색하고 엄마한테는 이전에 정리한 방식과는 달라 머리스타일이 이상하다고 핀잔까지 듣기는 하였으나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금세 적응할 것이다. 내 머리는 신기할 정도로 너무 빨리 자란다. 머리에 대한 추억은 또 이렇게 한 꺼풀 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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