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멩이처럼 버티라고? 이걸 어쩌지, 난 돌멩이가 아닌데.
버텨라. 버티면 낙이 온다.
도전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만큼 '버티는 힘' 역시 강조되는 세상이 왔다. 회사의 부장님이 꼽을 준다고? 이사님이 자꾸만 술을 먹인다고? 네 능력을 끊임없이 시험하며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해서 멘탈이 갈린다고?
그러면 버텨!
버텨봐, 일 년 버티고 이 년 버티고. 그러면 좀 나아질거야. 그 때가 되면 너도 연차가 쌓이고 왜 그 사람들이 너에게 그랬는지 알게 될걸? 지금 그만둔다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너 직장 그만두면, 알바 그만두면 어떡할거야? 먹고 살 방법은 있어? 월세는 또 어떻게 내고.
이게 조언인가 욕인가 싶다. 아무튼 세상은 버티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예를 들어 신조어로 존버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가? 존X 버텨! 일단 버티라고! 글쎄, 버티는게 내 주식에도 내 대인관계에도 통할지 모르겠다마는 주변에서 그리 이야기하니 한 번 버텨볼까?
장담컨대 버티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도 못할 뿐더러 무책임한 말이다. 펄펄 끓인 얼큰한 국요리도 과도하게 오래 끓으면 어떻게 되는가? 짜진다. 그리고 끝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맛이 된다. 바닥에 박혀 오랜 시간을 버틴 돌멩이는 어떻게 되는가? 잘게 다져져 조각돌이 된다.
그러나 내 인생을 요리하고 내 인생의 모양을 정하는 것은 나다. 누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인생 전반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반려라 해도 멘토라 해도 이는 불변의 진리다. 그들은 당신을 신경 써주는 말을 해도 다음날이면 다 잊어버린다. 그 말을 오래 품고 살아가는 건 오로지 당신 뿐이다. 참 뾰족한 말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진화했다.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버티는 것만이 해답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사회의 풍조가 됐다. 정확히는 어느 것을 버텨야하는지 어떤 것을 버텨선 안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버티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적당한 시련과 고난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야근을 피하지 않은 워커홀릭이 빠른 승진을 거머쥐고 끔찍한 완결고 퇴고를 끝낸 작가가 영광스러운 출간의 기회를 얻는다.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건강한 육체를 손에 넣는다. 비록 끔찍한 근육통이 딸려올지언정 그것을 살아있다 느끼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근육을 뽐낼 기회를 얻는다.
고통없이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치트키를 써서 플레이하는 게임이 된다. 치트키를 사용해 처음부터 일억골드나 최강의 무기를 얻었다고 치자. 그리고 나는 이제 엄청난 스펙으로 기껏해야 생쥐나 잡으러 간다.
와, 재밌다!
진짜?
아니, 그리 재미없는 거 같아. 치기도 전에 쓰러지네. 쩝.
퀘스트를 차근차근 클리어하며 얻는 즐거움, 내 무기를 강화해가는 재미와 노력, 강화 성공의 짜릿함. 이 모든 것이 게임의 재미를 만들듯 인생 역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고난이 필요하다. 공부를 평소보다 더했다. 시험 성적이 갑자기 쑥올랐네? 와! 이거 제법 짜릿한걸? 성취감에 따른 보상이 주어지면 사람은 즐거움을 느낀다. 이는 과학자가 밝혀냈으며 논문을 읽지 않아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내 총수용량이 용서하는 고난이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고난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찬찬히 설명해보겠다.
사람마다 각자 받아들이는 슬픔, 고통이 다르다. 누군가는 가족이 죽는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 있으나 누구는 하품만을 쩍쩍 할 수 있다. 같은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 우리는 고난 앞에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A는 야근에 능숙하다. 사실 야근에 따른 야근 수당을 받는데 재미를 가졌다. A는 야근을 하면서 생각한다. 아, 집에 돌아가서 씻고 자야겠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선 바나나를 먹어야지. 우리집 똥개 언제 목욕 시키냐. 어찌되었든 눈앞의 일은 처리하고 가야지. 룰루. 야근 수당을 받을테니까 다음달 휴일에는 애인이랑 경치 좋은 리조트에 가야지!
그러나 B는 야근이 싫다. 왜냐하면 B는 이른 시간에 푹 잠들고 아침 새벽 개운하게 일어나는 걸 즐기기 때문이다. B에게 수면은 정말 중요한 삶의 요인이다. B는 하루에 8시간은 무조건 자야한다. 그래서 야근을 시작한 벌써부터 짜증이 난다. 아, 나 막차타면 11시에나 도착할텐데…. 씻고 빨래 돌리고 자면 1시에나 잠에 들겠지? 그리고 나는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날거야. 그러면 5시간밖에 못자네?
그렇다면 A야말로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인가? 회사 내엔 A가 필요하며 B같은 인물은 A를 보고 본받아야하는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와중에 사건이 생겼다. 두 명의 위로 성격이 끔찍한 상사가 떨어졌다. 상사는 폭언을 잘한다. 기분에 따라서 같은 성과물이라도 반응을 내보이는게 천지차이다. 커피를 타오라 시키고 뒤에서는 쑥덕이며 분란을 조장한다.
B는 상사같은 사람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폭언은 싫고 짜증이 좀 나지만 이 회사는 그래도 괜찮은 곳이다. 특히나 B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나봤다. 이를 상대할 적당한 처세술과 눈치 역시 가지고 있다. B에게 중요한 것은 승진이 아닌 수면이다. 이 사람이 퇴근만 좀 일찍 시켜준다면, 하암, 그래도 우린 완전 끔찍한 관계는 되지 않겠지.
반면 A는 손톱을 뜯는다. 아이고, 큰일났다! 저런 놈이 내 상사라니! 난 이제 틀렸다. 오늘만 해도 세 번 째 불려가서 욕을 먹었고 나는 화장실에서 눈물을 휴지로 콕콕 찍었다. 짜증나, 짜증나. 확 그냥 노동청에 신고해버릴까? 아, 또 날 부르고 있다. 아까 썼던 보고서가 문제라고? 왜? …아니, 그 문제는 당신이 처리하기로 했잖아요! 왜 말이 바뀌는 겁니까!
A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은 끔찍한 상사, 그러니까 불편한 대인관계다.
그리고 B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야근이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세상엔 이런 경우가 많다. 사람마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척도가 다르다. 그런데 세상은 무작정 버티라고 한다. 나는 저것을 도저히 못버티겠는데 말이다.
버티지 못하는 것은 약한게 아니며 부끄러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경하고 당신에게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A 직원이 폭언에 못이겨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하면 "에이, 그 상사 하나 못버티고… 겨우 그깟걸로."라 이야기하며 말꼬리를 잡는 꼰대가 있다. 또한 B직원이 퀭해진 얼굴로 그만두었다 이야기하면 "야! 잠 좀 못자는게 어때! 야근 수당 꼬박꼬박주면 좋은 회사지!"하고 소리치는 꼰대도 분명 있다.
그러니 고통 앞에서 능숙해지려고 노력하지마라. 내가 느껴서 도저히 못버틸 고통이라면 한 발 물러나라. 괜히 손자병법에 "도망"이 하나의 전술로 기록된게 아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은 처음에는 부끄러울지 모른다. 허나 사람이 미쳐 패닉에 빠진다면 그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이걸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야근도 어느정도 하다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르고. 좀 더 버티면 앞길이 보이지 않을까요?
이는 나한테 질문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오로지 걱정할 따름이다.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등불을 가지지 못했다. 내 자신을 통찰하고 싶어도 정작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거울에 사람을 비춘다고 해서 정신력이 얼마만큼 깎였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버티기 힘든 고통을 직면한 사람은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나길 마련이다. 음식을 소화하기 힘들어요, 밤에 잠도 못들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변 사람에게까지 히스테릭을 부리고 있어요. 다만 그래도 알기 힘들다면 주변에게 상담하자.
나 요즘 좀 힘든 거 같은데 나한테 뭐 달라진 거 있어? 정말 너 아니면 말할 사람 없어서 그래.
부모님이나 친구 혹은 직장 상사…. 정신병원의 의사 선생님이라도 좋다. 사실 의사 선생님께서 이 분야의 갑 아니던가? 마음에도 처방이 필요하니 필요하다면 꼭 방문하도록 하자. 만약에 이 모든 것이 힘들 경우엔 나에게라도 좋다. 나는 다행히도 프리랜서며 심심하면 알람을 확인하는 편이다. 댓글을 남겨준다면 나는 기꺼이 몇 마디를 얹을 수 있을 것이다.
장담컨데 당신과 똑같은 시련을 겪는 사람이 어딘가에도 있다. 그 사람이 이겨냈다고 해서 당신마저 이겨낼 수 있는건 아니다. 세상에는 무수히 갈래가 있고 그 길이 아니라도 당신은 성공할 수 있다. 확실하다. 우리는 아직 수색을 덜한 것 뿐이다.
그러니 기억하자.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도망쳐도 좋다.
완전히 늦은 것은 없고 너무 이른 것도 없다.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당신은 귀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