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파장, 신경림
<파장(罷場)>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서울이 자꾸만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농무(農舞) / 신경림 -
파장(罷場): 장날 장이 마감되는 모습을 뜻함
목로 :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하여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
섰다 : 화투패를 이용해 두 장의 패를 조합해 족보를 겨루는 한국의 전통 노름 게임
색싯집 :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파는 집
장터는 언제나 소란스럽다.
값을 흥정하는 목청 높은 소리가 오가고,
돈을 세는 손길이 바쁘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자리를 펴고 만남을 갖기도 한다.
장날은 평소의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날이기도 하다.
막걸리 한 사발, 국밥 한 그릇, 아이들 손에 쥐어주는 엿가락 한 줄기에서 잠깐의 기쁨과 해방감을 맛본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시는 첫 행부터 웃음이 난다.
여자들은 만나면 서로 칭찬하며 인사를 시작하지만 남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안심(?)하며 웃는다고 한다.
그러니 못난 놈들끼리 얼굴을 마주 보고 흥겨워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재미있다.
하지만 시에서 ‘못난 놈’은 단순한 외모의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허술해도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못남을 비춰도 아무렇지 않은 공동체적 재미가 풍긴다.
잘난척할 필요 없는 곳, 그래서 더 편안하고 신명 나는 곳-
장터는 서민들이 살아가기 위한 생계 현장이면서 온갖 감정과 풍경이 모이는 숨결의 장소가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서울이 자꾸만 그리워지나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왜 문득 ‘서울’을 그리워할까?
그리워한다는 건, 그것이 과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움이란,
‘서울’이라는 공간 자체의 의미 보다 그 안에서 살았던 ‘나의 시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무신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겨우 고무신, 겨우 조기 한 마리.
하지만 꽃무늬 고무신을 기다리고 있을 달뜬 딸아이를 떠올리면 설렌다.
통 식사를 못 하는 어머니께 살 발라드릴 조기 한 마리로도 기쁘다.
이토록 사소한 행복이 삶을 풍족하게 한다.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복작이던 장날이 끝나고 파장한 장터는 텅 비어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떠난 자리에는 먼지만 흩날리고 허무함에 휘청인다.
<파장> 속 풍경은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세계는 지금, 무법 정치가 난무하는 선동과 함성으로 가득하다.
그 요란한 목소리들은 잠시 세상을 흔드는 듯 보이겠지만,
파장 후 남는 것은 갈라진 민심과 누적된 피로감일 뿐이다.
번영과 성장은 외양일 뿐, 삶을 이어가는 존재들의 고통은 변하지 않는다는 역설-
서민들의 삶은 과거에도 현재도 언제나 장터날 <파장>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고달픔을 안고, 허무함을 뒤로하고,
누추하고 고달픈 행복이지만
언젠가 그 소박한 힘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므로.
by. 예쁨
말하자면,
농장은 그 자체로는 전보다 부유해졌으면서도
거기 사는 동물들은 하나도 더 잘살지 못하는(물론 돼지와 개들은 빼고) 농장이 된 것 같았다.
- 동물농장, 조지오웰 -
*돼지 이미지 출처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