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인화
프리즘
한 줌의 빛이 태어났다.
꺾이고 굴절되었고,
벽이라는 장애물을 만나 부딪혔고,
마침내 찬란함을 흩뿌렸기에
빛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삶은 빛으로만 완성되지 않으며,
결코 한 가지 색일 수 없다.
제 아무리 밝은 빛이라 해도 부딪히고, 부서지고, 꺾여야만 한다.
찬란함으로 물드는 동안 모든 빛을 통과시키고,
비로소 아름다운 무지개가 완성되듯이-
이야기 도둑
책 속으로 깡총깡총
토끼가 들어와서 하는 말
잠시 나랑 놀자
책장을 넘겼더니
이야기를 훔쳐 달아나버렸네
햇살 좋은 어느 오후,
유난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내 마음을 눈치챘을까?
토끼 한 마리가 책 속으로 폴짝 뛰어들어왔다.
잠시만 놀아달라며 떼를 쓰기에 놀아줬더니
그만 글자들을 훔쳐 달아나 버렸다.
결국 책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더라고?!
늑대가 나타났다
조심해!
위험은 빛을 밟고 오는 법이니까.
유난히 잠이 많던 삼봉이는 햇살을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며 잤다.
(간헐적 천재견이었음)
장난치는 줄도 모르고 까무룩 잠든 네가 언제까지나 평온할 줄 알았어.
그땐 그랬어, 정말로.
하리곰
햇살이 의자에 기대어 쉬는 시간
말랑말랑 하리곰 하나
나른한 오후 두 시의 맛
오후 두 시는 여유만만하다.
길어진 햇살이 밀려오면 온몸에 나른함이 퍼진다.
저녁 메뉴 따위,
내일 할 일 따위,
죄다 모른 척하고 싶다.
오후 두 시는,
늘어지도록 게으르고 나른한 맛 하리곰이다.
도시의 오후
도시 한복판
무표정한 얼굴로
그림자 속을 걷는 사람들
늘어진 피로감이 도시를 삼키고 있다
오후 4시,
퇴근이 몹시 마려운 시간.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그림자가 먼저 쓰러진다.
도시 속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림자만큼이나 어둡다.
직장인들의 사회성과 에너지는 오후 4시에 전부 소진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연구결과임)
그러므로 4시 이후부터는 굉장히 예민해지므로 일의 효율성 또한 떨어지는 것이다.
도시의 오후는 쓸쓸하고 피로하다.
케이블 자리
빛이 만들어낸 별자리
전선 따라 이어진 우주
우리 집은 우주 접속 중
별자리는 캄캄한 밤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햇살이 쏟아지던 아침,
브라운관 뒤로 수많은 점들이 연결되어 마치 별자리처럼 보였다.
별자리 이름은 <케이블 자리>
우리 집에는 낮에도 별자리가 뜬다우?
빛의 그물
밤이 던진 그물에 빛이 걸렸다.
하지만 어둠은 빛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오직 어둠 속에서만
빛의 전부를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우리는 늘 빛을 향해 밝은 쪽을 먼저 바라보지만,
삶은 어둠이 포함된 그림자까지 품고 있는 것이다.
밝은 빛만 쫓아 살 수 없듯이,
그림자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다.
위대한 일들은 특별한 모습으로 찾아온다고 믿던 시절이 있다.
반짝거리는 보석만 빛나는 줄 알았다.
매일 누구에게나 비추는 햇빛처럼 일상적인 것들의 반짝임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한밤중에도 가로등 불빛 아래 보도블럭에 섞인 돌조각들이 작은 우주처럼 빛나는 길을 걷는다.
- 도시와 테이블에 놓인 노트, 오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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