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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쁨 Nov 03. 2024

천천히

하루야, 안녕?

나에게는 몇 가지 직업이 있고, 급여와 무급여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정주부와 작가는 무급여다.  하물며 퇴직금도 없는 가정주부는 24시간 풀가동 해야 한다. 밖에 나와있다고 해서 집안일이 예외인 것도 아니다. 아이들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고, 가족들의 식사시간등을 체크하며 장을 보고, 반복되는 매 끼니 식사메뉴에 머리를 굴려야 한다.

얼떨결에 두 권의 책에 이름을 새기며 출간했지만 6개월이면 커피 한 잔 정도 살 수 있는 수익금이 입금되는 미미한 정도이니 작가도 무급에 가깝다.

(브런치도 무급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요즘은 새들에게 무료 배식을 하는 일도 있는데 이건 인간으로서 미안한 마음에 시작한 일이니 무급이어도 괜찮다.

(박새가 언젠가 박 씨라도 물고 와주리라는 기대 같은 것은 안 한다. 정말 안 한다. 정말 정말 정말.)


장애인 활동보조사는 내 직업 중 유일하게 급여를 발생시킨다.

급여를 제공받으면 조금 더 책임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내 급여는 국민들의 피 같은 세금으로 만들어진 국고로부터 나온다.

나에게는 전맹 시각장애인과 동행하는 일이 주어졌고 어느덧 동행자와 8개월간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동행자는 24살 늦깎이 신입생이다. 등하교와 학교생활을 돕고 있으므로 택시, 지하철, 버스등 다양한 이동수단을 이용하며 그녀의 보행을 돕고 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코로나라는 악재도 있었겠지만 활동보조사의 나이나 역할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활동보조사의 평균나이는 높은 편이다. 퇴직 후 또는 나와 같이 가정주부로 생활하던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따금씩 교육을 받으러 가보면, 오히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분들이 활동보조 일을 하시기도 한다. 분명 나이가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으로도 그렇지만 감정적으로 더 그렇다.

나의 동행자 역시 나보다 젊은 친구가 함께 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밖으로 나갈 기회가 크지 않았던 젊은 여성에게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급여가 주는 책임감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장애인들에게 주어지는 택시 바우처 서비스가 있지만 되도록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노력한다.

무엇보다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녀의 건강은 빨간불이다. 혈압과 당뇨수치가 높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럴 기회나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내기도 어려워서 결국 이동할 때만이라도 조금 더 걷고 느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행인과 함께 대중교통을 타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눈을 감고 있긴 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녀가 시각장애인이라고 눈치채기 어렵다. 장애인/노약자석은 언제나 만석이고,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시선이 휴대폰을 향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일리 없다. 자리양보를 받지 못하는 일까진 괜찮다. 이동 경로에 점자블록이 끊겨버리는 일은 너무 흔해서 지팡이로만 의지해서 보행하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일이다.

버스 정류소의 음성안내서비스는 또 어떠한가? 외부 소음으로 안내 내용을 듣기가 불분명하고, 승하차 장소도 안전하지 못하며, 계단도 가파르다. 장애인이라고 밝히고 탑승해도 의자에 앉기도 전에 출발해버리거나, 장애인 벨(일반 벨보다 긴-음을 내서 장애인이 내릴 것임을 미리 알리는 벨)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좀 내리라고 재촉하는 기사님도 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려는 중에 타야 하는 버스가 옆으로 슥-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필 그날은 지하철에도 문제가 생겨 한참 진땀을 빼고 내렸던 상황이다. 이러다 수업에 지각하겠다 싶었는데 떠나려던 버스가 가다 말고 멈춰 섰다. 1분 1초가 바쁜 아침 출근시간인데, 설마?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건가?

남들이 보기엔 느릿느릿이겠지만 우리는 나름(?) 빠른 걸음으로 정류장 앞까지 다다랐다. 버스에 오르자 기사님이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켜 주신다.


천천히 타세요~


무사히 버스에 오르고 장애인석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기사님과 승객들이 묵묵히 기다려 주었고, 하차할 때도 천천히 내리시라며 한 번 더 친절하게 안내해 주셨다.

”천천히 “라는 말이 왜 그렇게 코끝 찡하게 감사한지 기사님의 따뜻한 배려에 하루종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동행자와 다니며 ‘천천히’라는 말이 얼마나 필요하고,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게 된다.


돈을 받는 일에는 마땅한 의무가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동행자의 안전한 보행에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돈을 받는 일, 받지 않는 일 모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일은 꽤나 가치 있는 일이다.

밥상을 차리고 집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 또한 가족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 삶은 나를 꾸준하게 성장시키는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느 바쁜 아침,

752번 기사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값어치 있는 너그러움이었다.



by. 예쁨






속도는 조급함을 낳는다.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은 삶의 속도와 반비례하여 줄어든다.

인터넷 연결이 왜 이렇게 느려?

피자는 아직 안 온 거야?

조급함은 미래를 향한 탐욕이다. 인내는 시간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 에릭 와이너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시몬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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