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되기 전 거쳐야 하는 거친 잡문들 나름의 본색들
“네가 오고 나서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멍청이나 바보가 되기를 반복하다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며 추위와 더위가 몸을 파고들어도 모르고 잡초가 우거져도 손질할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방치하며 때론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일 때가 있고 남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게 다 글이라는 네가 시킨 일이다.”
고려시대 문필가 이규보 선생의 글이다. 처음에 이 글을 접했을 때는 단지 선생의 글귀(글句)가 참 좋고 인상적이었는데 볼 때마다 이규보 선생 정도면 아예 글 귀신이 붙어 쓴 글귀(글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그런 글귀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 여기에 실릴 글들은 내 글귀들이 붙어 이루어진 것들이다. 물론 모든 글귀들이 순순히 붙어주지는 않았다. 끝내 접신(接神)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언젠가 그 귀들은 지금 이 글들 외에 다른 글이 되어줄 것이라고.
시작부터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할 수도 있고 '귀신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제정신이 아니구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시 이규보 선생의 글귀를 빌리자면 “때론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일 때가 있고 남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르며... 이게 다 글이라는 네가 시킨 일이다”라고 하지 않나. “잘 되면 내 덕이고 안 되면 조상 탓”이라지만 내 경우에는 반대로 글이 괜찮게 느껴지면 귀들이 잘 붙어준 덕분이고 아니라면 부족한 내 필력 탓이겠다. (책을 쓰는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의 저서를 ‘졸저’라는 겸양을 보일 때마다 심한 겸손이라 생각되어 어쩐지 마뜩잖기도 했는데 이제 내가 각 잡고 써보려니 그 기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잡문본색은 영문본색과 번역본색에 이어진다. 영어 공부의 재미와 흥미를 높여줄 영문들을 통해 영어의 본색을 드러내겠다는 영문본색, 번역과 관련한 일화들과 단상들로 번역의 본색 탐방에 나서겠다는 번역본색을 쓰면서 거기에 속하지 못할 글들을 추려 잡문으로 묶어 그것들 나름대로 지니는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려 한다. 물론 마음처럼 잘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원래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 마음의 ‘본색’이고 일단은 밀고 나갈 생각이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글을 밀고 나간다는 느낌으로 쓰는 것이지만 쓰다 보면 글이 나를 이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 느낌이 바로 글귀가 붙었다는 느낌이다.
“인간은 저마다 마음에 감옥소 하나씩 두고 산다.
그 감옥소의 크고 작은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용기라면 용기이고, 후회라면 후회이리라.”
김탁환 작가의 <대장 김창수>라는 작품에 쓰인 저 글귀가 좋아서 외우다시피 한다. 감옥소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을 나는 치부를 드러내는 일로 받아들였다. 자기 자신이나 가족들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는 작가들이 있다. 혹자들은 그들의 그러함을 혹평도 하겠지만 나는 그 드러냄을 들어주고 싶다. 저렇게까지 드러낸다면 그만큼의 절박함이나 간절함이 그 속에 있을진대 먼저는 그 속살을 평하기 전에 그 속삭임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인간적인 문제다!”는 말을 남기고 그 뜨거운 불길 속으로 타들어간 전태일 선생의 말을 나는 일단 그렇게 실천하고도 싶다.
모든 염세주의자가 다 이상주의자는 아니겠지만 모든 이상주의자는 다 얼마간은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너무나 이상적이라 생각하면 마음속에 어떤 다른 이상이 싹 틀기는 희박할진대, 마음에 이상을 품는다는 건 적어도 그 품의 크기만큼은 현실에 염세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상주의적 염세주의자고 그래서 읽고 나서 불편함을 느끼는 책과 글을 선호한다. 때문에 나 역시 잡문본색에 그런 글들을 쓰고 싶다. 가슴 뻥 뚫리는 시원함이나 절대 공감을 부르는 따뜻한 치유의 글들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이미 많은 수요와 공급을 차지하고 있기에 내가 더 보태거나 얹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생각에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떤 어그러짐을 끄집어내어 소위 어그로를 끌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글을 쓰고 그걸 공개한다는 건 ‘내 생각은 이런데 다른 분들은 어떤가요?’ 하는 권유라고 생각하며, 그런 생각 ‘뭉치’들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망치’가 되어 아픈 곳을 때릴 때도 있겠지만 그게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게 진정 잘못이라면 누군가의 다른 ‘망치’가 나의 그런 잘못된 뭉치를 깨부수는 역할을 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