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면 읽어라

버티는 기술_기업유치

by 안나

기업유치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업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었다.

행정 지원도, 보조금도,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나는 행정 전문가라고 자부했다.

가족관계, 주민등록, 계약, 도시계획.

그 어떤 행정 용어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의 언어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반도체 전공정과 후공정, 팹리스, 파운드리,

낸드플래시, 웨이퍼, HBM. 이차전지,

양극재, 음극재, 전고체, 전해질, 제조업 코드,

외투기업, 소부장, ESG, ESS, Pyrophobia, 캐즘 등


처음 기업 관계자를 마주했을 때

그들의 대화는 마치 외국어처럼 들렸다.


그 순간 나는

井底之蛙(정저지와)였다.

우물 안 개구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돌파구는 단순했다.


읽는 것.

보고서, 산업자료, 기사, 전문서적.

모르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에게 큰 스승이 되어준 프로그램이 있었다.

KBS 「쌤과 함께」.


이차전지와 반도체 산업의 구조,

강대국의 패권 경쟁,

우리 산업의 방향 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전기차 배터리 화재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쌤의 마디가 나를 붙잡았다.


“화재가 무서워 전기차 개발을 멈춘다는 건

불이 무서워 불을 쓰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필요한 것은 포기가 아니라 기술의 발전이다.”


위험을 이유로 멈추는 것은

안전이 아니다.

그것은 제로 리스크라는 환상이다.


현실에 위험 0은 없다.

대신 위험을 관리하고 줄여가는 기술이 있을 뿐이다.


그 후 천안의 한 이차전지 기업을 방문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전고체 배터리 이야기를 꺼냈다.


기업 관계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걸 알고 오셨네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상대를 존중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그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


행정에는 ‘검토 시간’이 있지만

기업에게는 시간이 곧 돈이다.


하루 지연은

하루의 인건비와

하루의 금융이자와

하루의 기회비용을 의미한다.


행정이 “조금 더 검토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시간 동안 기업은 이미 손익 계산서를 다시 쓰고 있다.


그 무게를 이해한 뒤부터

나는 결재를 미루지 않았다.

검토는 하되, 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기업은 친절보다

예측 가능성과 속도를 원한다.


모르면 읽어라.

읽으면 보인다.

보이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면 속도가 생긴다.


그리고 속도는

신뢰가 된다.

작가의 이전글무연고 행려환자와 연명의료 중단의 빈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