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실명

1화 봄날

by homeross

화창한 봄날이었다.

거리에는 온통 봄을 즐기러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따뜻한 햇살과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꽃내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들뜬 기분으로 따뜻한 커피를 한잔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의 향이 꽃향기와 섞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들었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쯤 한 노숙자가 시선에 들어왔다.

계절에 맞지 않는 겨울 패딩을 입고 있었고 때국물이 흐르는 바지는 맨질 거렸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 버린 채 제멋대로 뻗친 장발이었다.

키도 크고 자세도 반듯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해 언뜻 보면 노숙자로 보이지 않았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옷 차림새와 오랫동안 씻지 않아 얼굴에도 때가 잔뜩 묻어있어

대번에 노숙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한쪽 눈에 약국에서 파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하연 안대를 하고 있었다.


봄을 맞아 잘 차려입은 나들이객들과 대비되어 더욱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곳은 근처에 역이나 시설 같은 곳도 없고

직장인들이 많은 오피스 밀집 지역이라 노숙자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신기했다.

이질적인 관심으로 시선이 1분 정도 그에게 머물렀을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있던 그는 허리를 세워 몸을 일으키고는 터벅터벅 나에게 가까워져 왔다.


"커피 한잔만 사주시겠습니까?"


어느샌가 나의 앞에 다가온 그는 나에게 커피 한잔을 사주기를 요청했다.

보통 노숙자는 돈이나 먹을 것을 요구할 텐데 대뜸 커피를 사달라는 요청과

너무 정중하고 어쩐지 기품까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당황스러우면서도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죠. 뭘로 드시겠습니까?"


"같은 걸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와 같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해서 받아 들고는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커피를 받아 들고는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서는

여유 있게 커피의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을 구걸해 바로 술을 사 먹거나

도박에 탕진하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커피 한잔을 요청한 그가 특별하게 생각되었고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작은 선의를 베풀었다는 느낌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며칠이 지나 나는 다시 그 카페를 찾았다.

오늘도 따뜻하고 기분 좋은 날씨였고 나는 역시 커피를 주문하고 야외에 앉았다.

커피를 두 모금쯤 마셨을 때 시선 끝에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과 똑같은 차림새였다.

그는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내쪽으로 반듯이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와

며칠 전과 똑같은 말투로 나에게 커피를 요청했다.


"커피 한잔만 사주시겠습니까?"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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