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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즈 없는 안경

by 아침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세월 이젠 알아요. 그 추억 소중하단 걸.

가진 건 없어도 정말 행복했었죠. 우리, 아프지 말아요. 먼저 가지 말아요.”


귀에 익은 양희은의 노래가 차 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흥얼거리며 몸을 리듬에 맡긴다.

‘참… 이런 노래가 좋은 걸 보니,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옆자리 엄마가 말한다.

“아 좋네. 이 알이 없는데도 잘 보였어. 눈이 좋아졌나 봐.” 그러면서 오른쪽 안경 렌즈를 손으로 꾹 누른다.

“엄마! 그러면 손자국이 남잖아”

오전에 주간보호센터에서 렌즈가 하나 없는 안경을 끼고 색칠 공부를 했던 얘기다.

“엄마, 연습을 해보자! 안경을 어떻게 벗어야 해?”

“이렇게”

엄마는 두 손으로 안경태를 잡고 살짝 벗는 시늉을 한다.

“잘했어, 아까 그 사람이 한 손으로 벗으면 안경알이 빠질 수도 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꼭 두 손으로 벗어야 해! 요즘 안경테는 얇아서 쉽게 휘어진대”


엄마는 렌즈 없는 안경을 만드는 달인이다.

나의 '마이너스 손'은 엄마를 닮은 것 같다.

요즘 들어서야 나의 덤벙대고 칠칠치 못한 성격이 엄마를 닮았다는 걸 깨닫고 있다.

아무튼 엄마는 항상 오른쪽 안경 렌즈 하나를 빠뜨리고 나를 찾는다.

“이거 좀 끼워줘”

“아이고, 또 빠뜨렸어.”

처음엔 안경테가 문제인 줄 알고 새 안경을 맞췄다.

그런데도 자꾸 렌즈가 빠져서, 그때마다 다시 끼워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렌즈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안경 렌즈는 어디로 간 걸까?’

이불, 서랍장, 화장대, 침대 밑까지 다 뒤져 봤지만 렌즈는 나오지 않았다.

일단 내 돋보기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공부할 때만 껴. 계속 쓰면 머리가 아파. 돋보기라서”

“아냐, 안 끼고 갈래. 요즘 눈이 잘 보여. 안경 안 써도 될 것 같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 이따 센터 끝나고 돌아오면 안경 맞추러 가자.”

“아냐 안경 안 쓰고 살래, 눈이 좋아진 것 같아.”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정말, 눈이 밝아졌을까? 아니면 딸이 돈 쓰는 게 아까워서일까?’

치매가 나빠지거나 좋아지는 증상은

‘본인의 욕구가 먼저 인가, 타인의 배려가 먼저인가’로 나타나는 것 같다.

어린 시절, 엄마는 식탁에서 늘 생선 머리를 먼저 집어 가셨다.

“난 대가리가 맛있어.”

지금 엄마는, 그 옛날처럼 딸을 배려하고 있는 것 같다.

치매란 엄마로서, 아내로서, 이웃으로서의 책임감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엄마는 내 돋보기는 그대로 둔 채, 렌즈 없는 한쪽이 빈 안경을 끼고 센터로 가셨다.

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엄마를 재촉해 단골 안경점으로 갔다.

“렌즈가 빠지지 않는,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안경테가 있나요? 자꾸 렌즈가 빠져서요.”

“아니요. 이것만큼 가벼운 것은 없어요. 손으로 빼려고 해도 잘 빠지지 않는데…”

“안경을 닦으려다가 힘을 너무 줘서 빠지나 봐요. 제가 미리 닦아드렸어야 했는데…”

“그렇기도 하지만, 안경을 벗을 때 한 손으로 벗으면 렌즈가 빠지기도 해요. 안경테가 휘어져서요.”

아하! 마치 득도한 듯 머리가 맑아졌다.

그랬구나. 엄마가 왜 그렇게 렌즈를 자주 빠뜨리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엄마의 시력을 테스트하니, 다행히 나빠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나 더 있는 오른쪽 렌즈 없는 안경까지 포함해 두 개의 렌즈를 새로 끼었다.


돌아오는 길, 엄마는 신이 나셨다.

“야, 잘 보이네.” 빠졌던 오른쪽 안경 렌즈를 꾹 누르신다.

“엄마, 안경을 벗을 때는 두 손으로 벗어야 해. 자, 연습해 보자! 어떻게 해?”

“이렇게.”

엄마는 두 손으로 안경테 양쪽을 잡고 조심스럽게 벗는다.

“잘했어. 그렇게 벗어야 해. 한 열 번은 더 연습하자!”

엄마는 분홍색 안경집에서 클리너 천을 꺼내 접었다 폈다 하며, 창밖의 맑아진 세상을 바라본다.


그때, 라디오에서

‘너만 있으면 돼~’

양희은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엄마는 이렇게 내 곁에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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