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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장갑

by 아침

“이뻐~ 너무 이뻐”


곧 겨울이 올 줄 알고 준비해 둔 가게 앞의 겨울 소품들이 무색하다.

12월이 가까워져 오는데도, 따뜻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이 길가에 떨어진 은행잎처럼 곱고 부드럽다. 겨울용품으로 꾸며놓은 진열대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겨울은 아직 먼 얘기니까.

그럼에도 내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분홍빛 손가락 털장갑.

‘에이 집에 있는데 뭘~ 또 사’

애써 지나친다.


생활협동조합에서 주최한 고추장 담그기 체험에 참여했다.

이번 체험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키트처럼 미리 준비된 재료를 하나씩 넣고 섞기만 하면 끝. 쉬워도 너무 쉬웠다. 조리법 설명서만 봐도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 너무 쉬워서 한편으론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동시에 ‘나도 장을 담글 수 있겠다.’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이래서 배우는 게 소중한 거구나’


고추장을 만들어 작고 예쁜 항아리에 담아서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까 그 가게 앞, 다시 눈길을 끄는 그 분홍색 장갑.

‘연보라색 패딩과 잘 어울리겠는걸? 크기도 이만하면 딱 좋아.’

결국 사 들고 돌아오는데, 엄마의 환한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청춘 대학⁎에서 돌아온 엄마에게 장갑을 내밀며,

“엄마, 이것 봐”

“아, 이뻐~ 너무 이쁘다!”

“잘 맞는지 껴봐”

“딱 맞아! 딱 맞아!”

취 향 저 격

나는 오늘도 선물을 받았다.

엄마의 환한 웃음.

엄마도 오늘 동심을 선물로 받았다.

늘 자식에게 주기만 했던, 예쁘고 귀한 것을.


밤.

퇴근한 남편과 얘기를 나누는데, 엄마가 분홍색 장갑을 들고 들어오신다.

“이거, 너 끼어”

“왜? 엄마”

“작아. 나는 쓰던 것 있잖아.”

“엄마, 그거 작은 거 아니야. 젤 큰 걸로 산 거야.”

“아냐, 너 끼어”

“엄마, 나 장갑 안 껴”

“그래…”


엄마가 예뻐서 딸에게 주고 싶은 것 같아서 한사코 사양했다. 그래도 헷갈리긴 했다. ‘진짜 작아서 불편한 걸까?’


TV 소리가 왕왕거리는 엄마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연보라색 패딩 주머니에 분홍색 장갑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한 시인의 시구가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엄마의 마음을 잘 모르는 딸’


거실 소파로 돌아와서 앉아 있는데, 엄마가 또다시 분홍색 장갑을 들고 나오신다.

“이렇게 끼는 게 맞아?”

뒤집어 끼셨다.

“아니…”

‘내 교육자의 자질을 십분 발휘할 때다!’

“엄마, 여기 앉아봐.

자, 손을 펴봐. 손등과 손바닥 중 어디가 오돌토돌해?”

엄마는 손등을 가리킨다.

“그렇지! 손등이 오돌토돌하지! 장갑은 어디가 오돌토돌해?”

엄마는 장갑의 오돌토돌한 면을 가리킨다.

“그렇지! 그러니까 오돌토돌한 면을 맞춰서 끼면 되는 거야.”

“아이고, 우리 딸 잘 가르치네! 우리 딸 똑똑이 선생님! 잘 가르치네~.”

오돌토돌한 손등과 평평한 손바닥을 장갑의 오돌토돌한 꽈배기 뜨기⁑와 평평한 겉뜨기⁂ 모양에 맞춰 설명해 드리자, 엄마는 대만족이다.

엄마는 “똑똑이 우리 딸”을 연발하신다.

“엄마, 한 번 껴보자”

“응응~”

“옳지 잘했어! 이제 어느 손에 끼는지 물어볼게.”

나는 엄마가 벗어놓은 장갑의 순서를 막 바꿔가며 물었다.

“이건 어떤 손에 껴야 해?”

엄마는 잘도 맞춘다. 나는 스스로 설명에 흡족해하며 뿌듯한 마음에 어깨의 힘이 빵빵 들어간다.

엄마가 내일을 준비해 놓으셨다.

TV를 보는 의자 앞 탁자,

분홍색 장갑이 왼손, 오른손 나란히 놓여 있다.
오돌토돌한 면이 위를 향한 채로.


엄마는 내일,

연보라색 패딩에 분홍색 장갑을 끼고 청춘 대학에 가실 것이다.

짝을 잘 맞추어 끼고.


오늘 밤,

엄마의 꿈속에는

나와 어린 엄마가 함박눈을 맞으며 눈싸움하지 않을까? 분홍빛으로 물든 눈 뭉치를 들고.



2024년 11월 26일



각주 :

청춘 대학⁎ 주간보호센터를 센터 관계자와 참여자가 부르는 말

꽈배기 뜨기⁑ 바늘에 걸린 코들을 교차시켜 꼬인 모양을 만드는 기법

평평한 겉뜨기⁂ 바늘 앞쪽에서 실을 걸어 겉면이 보이게 뜨는 기본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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