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언덕배기 민박집
민박집은 오클랜드 언덕배기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민박집 마당에서 바라보면 샌프란시스코 만의 훤히 내려다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에서 보는 저녁 일몰은 장관이었다. 오클랜드는 샌프란시스코와 만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샌프란시스코 관광할 할 때마다 만 위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다녀야 했다.
오클랜드는 이름 그대로 하며 오크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특별히 오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이 났다. 그 동네는 문학산을 등으로 두고 있었다. 그래서 틈이 날 때면 문학산을 올랐는데 산으로 오르는 길은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야했다. 그 굴다리 벽에 벽화를 그러놓았는데 비가 오지 않아 척박한 미국 서부 어느 지역의 땅에 매년 꾸준히 오크나무를 심어 마침내 비옥한 땅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온 산이 푸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곳이 혹시 오클랜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내 기억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오클랜드에 참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오클랜드는 숲과 집이 거의 반반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건 샌프란시스코도 그랬고, 아이들이 살고 있는 볼더도 그랬다. 집과 숲이 공존하는 형태였다. 결국 사람들이 공기가 참으로 맑은 청정구역에서 사는 셈이다. 늘 황사와 미세먼지와 더불어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탓인지 사람들은 모두 느긋했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도로를 지날 때도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묵묵히 기다렸다. 횡단보도에 사람이 지나도 차량은 정차해서 횡단보도를 모두 지날 때까지 기다렸다. 길을 가다 마주치면 모두가 가볍게 미소를 건네거나 손을 들어 정감을 표시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붙여진 것인데 이곳 사람들이 더욱 그래보였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옛날 중국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일컬어 부르던 말이었다. 즉, 우리나라를 일컬어 ‘해 뜨는 동방의 예의지국‘이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의 공자도 자기의 평생 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빌려 보면, ’어진 사람‘,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 한다‘,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않아 문을 걸어 잠그는 법이 없다’, ‘여자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두터우며 음란하지 않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동방예의지국의 덕목이었던 모양이다. 고조선 시대에 어떤 힘이 우리 민족을 이렇게 어진 사람으로 만들었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공자가 우리나라에 와서까지 그 예를 배우려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당시의 예의범절이라면 대체로 가풍이 그 출발일 것이고, 그러한 가풍들이 모여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갔음직하다. 요즈음처럼 학교가 따로 없어도 가정이 훌륭한 학교 구실을 하는 덕분에 이러한 문화는 더욱 공고한 과정을 거쳐 중국에 까지 입소문이 난 것일 테다.
요즈음은 인성교육을 아무리 외쳐도 교육의 학생은 시큰둥하고 교사도 별반 흥미를 가지지 못한다. 자칫 꼰대소리 듣기에 딱 좋은 소재가 바로 인성교육인 듯 전락하고 말았다. 그에 비례해서 학교 폭력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사회는 점점 잔혹해져가고 있다. 위정자들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이걸 어떻게 활용할까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허망한 말들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진다.
고조선 시대의 가정교육만을 가지고 예의범절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이상은 내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지라 여기서 발길을 돌려야할 것 같다. 그저 지금은 짧은 독서를 한탄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흉포한 세태 탓에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 집에 문고리는 두세 개 정도 달아야 마음이 편하고, 개명천지 지금에야 여자들이 너도 나도 <미투>를 외쳐대는 중이다.
어제의 피곤 탓에 우리는 느긋한 아침을 맞았다. 어제와 달리 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맑은 날에 공기마저 맑다는 것은 축복으로 여겨졌다 늘 희뿌연 하늘이거나 먼지가 가득한 하늘을 이고 살았던 탓에 이곳의 공기는 신기할 정도였다. 심지어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달콤하기까지 한 것 같았다
우리는 아침에 잔뜩 여유를 부리고 아점을 먹기로 했다. 패키지여행에서는 도무지 누릴 수 없는 그야말로 멋진 여유이자 호사였다.
샌프란시스코 둘째 날, 아점을 먹다
10시 경에 민박집을 나서서 시내의 유명한 맛 집으로 향했다.
<마마스>라는 브런치가 유명한 집이란다. 11시간 채 안 된 시간에 도착한 그 맛 집은 이미 음식점 바깥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세상에 아침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에 한 끼를 먹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다니. 이 사람들은 아침보다는 점심에 슬쩍 걸쳐서 먹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침나절에 음식점 앞에 긴 줄이 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음식점 직원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기다리는 대략의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은 우리가 줄은 선 위치는 대략 1시간 30분 정도가 되어야 식탁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이건 아니다 싶어 하는 수 없이 줄 서기를 포기했다. 하루 관광을 줄서기로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갔다. 별로 크지 않은 곳이었는데 우리는 좁은 식당 안 대신에 식당 앞 간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오가는 이들을 보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맑은 공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은 제법 쌀쌀해서 우리나라의 늦가을 같더니만 지금은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 이런저런 음식들을 여럿 주문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했더니 그래도 먹는 동안에는 현지인이 따로 없었다. 늘 패키지여행에서는 보채듯이 먹어야 했고 정해진 시간에 버스에 올라야 하고 그리고 또 다른 관광지를 찾아가야 하고 설명을 들어야 하고, 길을 잃지 않도록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기 때문에 식사를 천천히 하는 사람들은 식사 시간에 늘 허둥대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런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그저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쉬어가면 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잠시 배를 달랠 겸 주변의 작은 공원으로 갔다. 우리나라에도 흔히 있을 법한 동내 한 쪽의 그야말로 쉼터 같은 곳이었는데 제법 정비를 잘 해두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그저 10여 분이면 충분한 그런 정도로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공원의 한쪽에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분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고 그 앞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피켓을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선거운동 중이었다. 그들이 돕고 있는 후보는 한국 사람이었다. 김재연이라는 여성이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지역 사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현재 지지율 2위를 달리고 있다고 하며, 당선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분석이었다.
멋진 승전보를 전해 들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공원 한가운데는 다섯 그루의 제법 키가 큰 미루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탑이 하나 있었는데 100년 후 후손들이 이곳의 오늘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묻어둔 타임캡슐 탑이었다. 1975년에 묻었고 2075년에 개봉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샌프란시스코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동네 또는 지역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들은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가르쳐 주려고 했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타임캡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학교마다 타임캡슐을 교내 정원 한쪽에 묻는 일이 흔히 있었다. 후손이 기억할 역사는 거기까지인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는 타임캡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늘 무엇이든 남이 하는 것 중 좋은 것이 있으면 금방 흉내를 낸다. 그러나 거기까지이다. 그 이후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자고 나면 또 다른 것에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벼운 사람들이고 민족이다. 이를 일컬어 냄비 근성이라고 했던가? 이곳은 모두가 정중동이다. 편안하고 느린 움직임이어도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하는 모양이었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천천히 해도 자기가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굳이 부산을 떨 필요가 있을까? 작은 것에도 감격하고 오래 기억하려 한다. 그래서 기념품 상점이 호황이라고 한단다. 우리는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 가문의 영광을 기필코 만들고 말리라는 참으로 소시민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일화천금을 꿈꾸고 무엇이든 남보다 많이 가져야 하고 빨리 움직여야 한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속이 후련하고 무엇인가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보면 그걸 어디에 쓰는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남이 하니까 남보다 열심히 그 일에 열중했다. 그저 그뿐이다. 예전에 공무원을 할 때의 일이다. 3~4년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감사가 나왔는데 그야말로 3~4년은 가만히 있다가 감사가 나오는 해는 그것도 두어 달 남겨두고 난리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야근을 해가면서 그 동안의 장부들을 뒤져 혹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부분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고쳐 놓는다. 그리고는 감사를 받는다. 당연히 별 탈이 없을 수밖에. 그렇게 밤샘을 하며 고쳐 놓았으니. 그런데 감사가 끝나고 나면 다음에는 다시 이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감사가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다음 감사는 또 그때 가서 밤샘 작업으로 수정을 하면 된다. 그런데 감사에 지적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정을 한 자료는 이미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난 일이다. 그걸 고쳐봐야 업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이 된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우리들에게 타임캡슐은 어떤 의미일까? 결국 우리에게 타임캡슐은 아주 먼 옛날이야기나 다름없다. 아무도 지난날을 추억하지 않는다. 지난날은 내 어두운 과거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일처리가 서툴고, 하는 행동이 서툴고, 결과가 서툴다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탓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비전은 공허하다. 과거의 농축이 현재라면 미래는 현재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들의 이런 서툰 일로 아이들의 꿈이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공원의 한쪽에는 멋진 성당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이라는 이름의 성당이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성당이었는데 몇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고 있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곳에서 보았던 성당과는 비교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왠지 정감이 가는 그런 성당이었다.
성당 창에는 스테인드 그라스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강렬한 햇살이 화려한 문양을 통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신비감을 자아내었다.
성당을 뒤로 하고 우리는 언덕 위에 높직이 서 있는 전망대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전망대 코잇 타워
전망대는 coit tower 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여행객은 전망대로 오르는 언덕길을 걸어서 오르거나 전차를 이용한다. 전차에서 풍경이 일품이라는 데 우리는 승용차로 으르기 때문에 그런 멋진 풍경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신속하게 전망대에 올랐다. 언덕 위에는 바람이 제법해서 한 여름의 쨍한 날씨를 잠시나마 식혀주는 듯 했다. 우리는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 1층 로비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 전망대로 오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전망대 로비를 휘감고 있었다. 전망대로 올라가는 승강기는 탑승 정원이 7명이란다 대략 어림해보니 한참을 줄을 서 있어야할 것 같았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아휴, 아까운 시간을 여기서 줄을 서서 다 보내야 하나?”
“전망대 높이를 보면 여기서 둘러보아도 충분할 것 같지 않아요?”
“그래, 굳이 올라갈 필요가 있겠어. 여기서도 다 보이는구만.”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드는 바람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긴 줄에서 스스로 해방감을 느끼며, 전망대 광장으로 되돌아 나왔다. 샌프란시스코는 샌프란시스코 만을 가슴에 안고 전망대 저만치 아래에서 빙 둘러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바다 끝에서 한 여름의 햇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하늘에서 본 도시는 비행장 주변이었던 셈이다. 마치 인천국제공항을 비행기로 들어오면 영종도를 내려다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곳은 도시 외곽임이 분명하다.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집들은 대부분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집이 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그저 황량하고 텅 비어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도시 외곽은 사막 지대와 인접한 곳이라 산도 침엽수 따위를 제외하면 관목이 별로 없는 돌산처럼 보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샌프란시스코는 만을 끼고 있는 도시 한가운데이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대도시 그대로였다. 이리도 아름답게 보이는 도시를 황량하게 보았다니 미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누군가에게 사과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샌프란시스코 주민 여러분, 이 도시에 대한 나의 첫 인상에 대해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전망대 광장에는 내 상식을 당황하게 하는 동상이 서 있었다.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콜럼부스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분명 서인도제도를 중심으로 활동을 했을 터인데 이곳 서부 지역 끝자락에 그의 동상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앗다. 아마도 콜럼부스가 오늘의 미국이 있게 한 사람이므로 그를 기렸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면 콜럼부스가 대서양을 가로질렀으나 이곳부터는 그보다 더 넓은 태평양이 펼쳐지고 있으니 또 다른 탐험가가 이 거대한 대양을 건너가길 기대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해보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해석은 나름의 것이므로. 그걸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샌프란시스코 만 한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있다. 마치 그곳에서 만을 관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거의 한 가운데 있는 섬이다. 알카트라즈 섬이란다. 그 섬은 원래 연방 주정부의 형무소로 쓰였던 곳이라고 한다. 섬 주변이 온통 바다여서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해서 ’악마의 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빠르며, 7~10도 정도로 수온이 매우 낮아 헤엄을 친다고 해서 살아서 탈출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당연히 아무도 탈출에 성공한 죄수가 없었는데 1962년 세 사람이 탈출을 시도해서 큰 화제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성공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고 생사여부는 비관적이란다.
지금은 형무소가 폐쇄되었고 관광객을 위한 투어 장소로 이용되고 있단다. 미리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 우리는 아쉽게도 그저 전망대에서만 내려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무리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샌프란시스코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넉넉한 대지에 집들이 숲과 어우러져 있고 그 너머로 푸른 태평양의 한끝이 찬란하게 햇빛에 부서지며 일렁이고 있었다. 그 위로 한가로이 배들이 지나고 부두 가까이로는 날랜 요트들이 물살을 가르며 이리저리 달리고 있었다.
전망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며 경치를 감상하다가 혹시라도 눈에 넣지 못한 곳이 있을까 싶어 연신 스마트폰 셔터를 눌러댔다. 그저 남는 건 사진뿐이리니-
전망대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한참을 내려다보다보니 그저 하루 종일 그곳에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살랑거리고, 눈호사는 어디다 비할 데가 없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얼마 후 새로운 곳을 보기 위해 언덕을 돌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