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와 보니 시간은 이미 어둠이 짓게 깔려있었다. 살을 후벼 파는 칼바람이 부는 12월의 추운 겨울 날씨였다.
병원까지 가야 하는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집을 나와 약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면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내 다리는 쉬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극심한 빈혈 때문에 앞이 흐릿하게 잘 보이지도 않았고 다리는 힘이 풀려 초집중해서 발을 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내 몸은 곤두박질쳐질 갓만 같았다. 아찔하고 아득했다.
잘못하다가는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몸이 이지경이 되도록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극심한 빈혈 증상이 나타나고 나서야 병원에 올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용기와 동시에 무지인가 싶기도 했다.
나를 부축해주는 작은 체구의 아내에게 겨우 의지하며 나는 천 근 만 근 같았던 발을 떼서 겨우 택시를 잡아탔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검색으로 찾아낸 가장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했지만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응급실이 있는 병원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문은 닫혀있고 아무도 없었다. 순간 머릿속이 아득하니 멍해졌다. 이 추운 겨울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가?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알아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큰 병원이 있었다.
우연히 거울에 비쳐 보게 된 내 얼굴은 백지장 같이 허여 멀 건하니 창백했다.
트와일라잇에 나오는 뱀파이어 같았다.
‘반나절 정도만이라도 빨리 병원에 왔다면 이 사달까지는 나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 몸에 대한 주인의식은 고사하고 무심해도 이번에는 너무 무심했다 싶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도착한 병원은 제법 큰 곳이었다.
24시간 응급의료센터를 운영하는 거점 병원이었다.
접수를 하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이름이 전광판 위에 올라왔고 이내 이름은 호명됐다.
몸을 휘청거리며 인턴의 지시대로 침상에서 대기를 하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응급실은 생각보다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학교 점심시간에 등나무 밑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볼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생처음으로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와본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 그 시절의 내 기억 속의 응급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초등학생이었던 그때 사건은 나와 친구들끼리 재밌게 놀던 중에 일어났다. 내 뒤꿈치를 친구 중에 누가 밟는 바람에 내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며 다치게 된 일이었다. 그때 오른쪽 뺨이 콘크리트 모서리에 찍혀서 볼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양호실에서 잠시 소독을 하고 나는 구급차를 타고 인근 병원으로 호송이 되었다. 생각보다 길었던 두 시간을 대기하고 나서야 봉합 수술을 받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받은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피곤에 절어 자고 있던 나를 깨워 불 같이 화를 내시며 내 친구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온갖 화를 내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 아버지가 나도 사랑하시고 계셨구나.’
나는 지금까지도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거의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용돈도 한 번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그저 나약한 쓸모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었다. 나와 다르게 위로 있는 누나 둘은 아버지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 왼손 잡이면서 젓가락질도 서툴고 말도 잘 못해서 더듬거리는 나를 아버지께서는 늘 못마땅해하셨다. 내 안에서 복잡하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어렸던 나는 늘 아버지가 무섭고 어려웠다. 표현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밥상머리에서 혼나는 날이면 밥이고 뭐고 다 싫었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화를 내시는 모습에서 내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사건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낯간지러운 말보다는 굵직하게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분이구나 싶었다.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충만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도 사랑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자존감이 성장하면서 그 전과는 다른 어린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서 그림만 그리던 소극적인 어린이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노는 골목대장으로 바뀌어 나가기 시작했다.
병원 옷으로 갈이 입고 멍하니 누워있는데 안정이 취해지기는커녕 어지러운 것이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은 더욱 아득하고 혼미해졌다. 모든 신체와 장기의 감각이 무뎌져 인형이 되어버린 것 같은 내 몸을 의사들은 이곳저곳 둘러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