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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엄버 May 02. 2023

아버지

아버지는 제가 자랄 때 유독 저에게 엄하셨습니다.

왼손잡이였던 저는 밥상머리에서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죠.


왼손으로 숟갈질을 하는 것도 언짢은데

그 마저도 제대로 잡지 못해 팔꿈치를 쳐들고

먹다 보니 옆 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다반사였고

매번 혼나다 보니 의기소침해지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와 식사를 하기가

꺼려졌었죠.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셨습니다.

박격포병이었던 보직 탓에

한쪽 고막을 잃고 고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신체 건강하시던 젊은 시절이라

귀가 한쪽이 안 들려도 크게 불편하시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참전용사에게 주는 좋은 직장 마다하시고

건설 현장에서 형틀목수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죠.

제 강점기 때 할아버지는 일찍 히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6살 때부터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 땔감을 주우러 다녔다고 하셨습니다.


월남에서 벌어오신 돈은 여동생 둘 결혼시키는데

다 쓰셨다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아버지는 다른 한쪽 귀도 망가져

보청기를 이용하시는데도 소리를 잘 듣지 못하십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월남 참전용사도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상의군인이신 아버지도 해당 사항이 있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저도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IMF시절이라

돈이 귀했고 벌기도 힘든 시절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다쳤을 때 의무대를 가지 못해

의무기록이 없었고 그나마 삼성장군까지

진급하신 당시 지휘관이었던 분도

헬기추락사고로 사망하시어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우 두 명을 찾았지만

한 명이 보증을 서주지 않아 끝내 좌절해야 했죠.


아버지는 선하고 인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세상은 이런 분들에게 왜 이리도 매정할까요,


다시 보훈처에 신청서를 내려합니다.

말뿐만이 아닌 문패만이 아닌

그 자격이 충분하신 아버지에게

국가유공자라는 명예를 안겨 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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