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시 경륜장으로 복귀했다. 3주라는 시간은 나에게 긴 시간이었다. 하루 꼬박 13시간의 노동은 나를 더욱더 부지런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3 주 쉬는 동안 경륜장 매점에는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던 냉장고 전원이 꺼지는 일이 발생한 일이 그것이다. 그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버린 것이었다. 사모님은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으실 때마다 의연하게 대처하시는 편이셨는데 이번 일에는 조금 많이 당황하셨다. 평상시에 전원이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당황하셨다.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다행히 재 개장 전 날에 모여 확인했기에 망정이지 일하는 날 나와서 처음 알았다면 장사를 망칠 뻔한 일이었다. 일일이 봉투를 까서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큰 통에 담아내고 나머지 껍데기와 나무 바를 타는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한참을 해야 일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그 사이 가락국수 재료를 납품하는 사장님도 왔다가 가셨고 물도 채우고 자판기도 한 바퀴 돌면서 상태를 점검했다. 이렇게 다시 일할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 간에 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광명에 돔구장을 하나 짓고 있는데 이것이 완공이 되면 이번 겨울 같이 쉬는 기간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단과 사모님과의 계약이 내년 6월까지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 들어오는 것은 공개 입찰이지만 힘 있는 사람이 뒤를 봐주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정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상황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길었던 겨울 방학도 끝이 났다. 드디어 나는 4학년이 되었다. 3년의 휴학과 군대 2년 그리고 중간중간 뜬 시간까지 해서 나는 거의 10년 만에 졸업을 하는 것이었다. 졸업 사진을 찍으니까 졸업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앨범이 비싸서 살지 안 살지 모르지만 실감만큼은 났다.
교양 수업을 거의 다 마친 나는 제2 외국어를 한 과목만 들으면 모든 외국어 수업을 듣는 것이었는데 졸업전시 등 모든 것이 끝나고 4학년 2학기 때 들을 참이었다. 성적 장학금을 두 번 타면서 다음 학기 때 3학점을 더 들을 수 있는 혜택 덕분에 학점에 여유가 있던 지라 이번 학기는 전공만 들어도 되는 정도였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작품을 미리 해 놓은 탓에 나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았다. 다른 작품들을 하며 공모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일단, 봄에 열리는 경기 미술대전에 낼 그림을 보름 만에 완성했다. 공모전 결과는 다소 아쉬운 입선이었다. 교수님이 내라고 해서 낸 거여서 아쉬움이 더했다. 열심히 준비한 탓에 공모전에 낸 그림까지 졸업 작품 심사를 받을 수 있었는데 다른 녀석들보다 완성도가 높아서 내 작품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교수님들은 거의 없었다.
졸업 전시에 낼 작품들이 결정이 되면 작품 사진을 촬영해서 도록을 만드는 업체에 넘기는 과정이 필요한데 아직 어느 업체도 선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학생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었는데 의외로 다른 학생들은 모든 권한을 졸준위에 위임을 해줬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졸업을 한 선배들 역시 계속 선배들이 해왔던 대로 그냥 관행대로 일을 봐왔기 때문에 매번 같은 업체에 일을 맡겼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신생업체를 섭외할지 기존의 업체에 일을 맡길지 교수님들과도 상의를 해야 할 문제였다.
수원에서 작품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작가는 많지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남문 쪽에서 사진관을 하는 작가를 섭외할 수 있게 됐는데 장당 15000원을 요구했다. 다른 곳에 비하면 조금 비싼 가격이었는데 이곳과 계약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곳에서 촬영을 하면 다른 곳과 다르게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스냅사진 필름을 모두 제공하기로 해서 그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디지털카메라가 갑자기 빠르게 보급이 되면서 대부분 디지털카메라를 선호했는데 이 작가님은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이제 도록 제작업체를 선정해야 되는 일이 남았다. 교수님에게 자문을 얻으러 갔더니 명함을 하나 주셨다. 우리 학교 2회 졸업생이 운영하는 디자인 사무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단, 약속을 잡고 만나 보기로 했다. 매번 맡기던 곳이 있었지만 퀄리티의 문제와 가격의 문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업체를 만나기로 해본 것이었다.
졸준위를 한 사람은 모든 일을 다 치르고 나면 자동차를 한 대 뽑는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남겨 먹을 수 있는 돈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소문일 뿐이고 나는 공정하게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졸준위는 작년과 비교를 해봐도 개인당 20만 원을 적게 걷었다. 그 정도의 예산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T.O가 열 명이나 느는 바람에 예산이 더 모이기도 했다.
2회 선배를 교수님과 졸준위 부위원장 미미와 함께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돌아왔다. 처음 뵈는 선배님은 생각보다 호탕하고 재밌는 사람이었다. 이동수라는 선배님이었는데 김 교수님과는 동기였다. 교수님이 재수를 해서 동수 선배보다는 한 살 많았다.
“ 반가워요. 주민 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 저도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작품 좋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저는 지금 경기대학교 시각디자인과 석사 과정에 있어서 학교 매주 가니까 한 번 작업장에 들러도 될까요?”
“ 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주말에 알바를 하니까 그때만 피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 작업장은 복도 끝이라 언제든지 개방이 되어 있어요.”
“ 자 선 후배 사이니까 편하게 이야기 잘하라고.”
교수님은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뜨셨다.
동수 선배는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 치고 구김살 같은 것이 없어 보였다. 화실 선생님 생각이 났다. 온전하지 못한 몸으로 일반인과 매번 경쟁을 해야 하는 외로운 인생길. 그 길을 비슷하게 걸어온 사람 같이 보였다.
모든 조건과 가격을 제시하면 어떻게든 조건에 맞게 조율해 보자고 제안을 하셨다. 작년 졸업생들은 도록을 만드는데 1100만 원 들었다는 말씀드리면서 나는 일 년 전 도록을 보여 드렸다.
“ 제작업체가 많이 먹은 거 같은데. 종이도 그렇게 좋은 거 쓴 건 아니 구만.”
“ 그래요? 이쪽에 지식이 미천해서 저희는 잘 모르죠. 근데 비싸다는 생각은 했어요.”
“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그렇고 나중에 시간 될 때 우리 사무실 한 번 와요. 걷지 와 속지 다 골라야 하고 단가랑 비교해서 값을 산출해야 하니까.”
나는 뭔가 모르게 전문가 같은 느낌을 받으며 신뢰도가 확 올라갔다. 그냥 종이를 보고 만지기만 했는데 종이의 종류와 원가를 아는 모습에 믿음이 갔다.
“ 종이가 워낙 다양하니까 와서 꼭 골라야 해요.”
식사를 하는 자리는 술자리로 바뀌었다. 미미는 학원에 간다며 일어났고 동수 선배랑 나는 술을 마시며 작품 이야기며 인생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주민이 말을 듣다 보니까 생각나는 사람이 있네.”
1회 선배님인데 나와 이름도 비슷했다. 교수님들한테 개기고 시위에 앞장섰던 기가 굉장했다던 선배라고 했다. 지금은 붓을 내려놓고 택배기사를 한다는 선배님과 전화통화를 시켜 주었다.
“ 아이고. 반가워요. 학부생인데 개인전도 하고 작품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 인사동에서 전시도 조만간에 한다면서요? 축하해요.”
“ 네. 운 좋게 그렇게 됐네요.”
인사동에서 잡지 발행을 하는 편집장과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관장들의 도모한 일이었는데 우리나라 각 미대에 공문을 보내 교수님이 선발한 1명들을 모아 전시를 하는 행사가 있었다. 우리 학교 같은 경우는 내가 선발이 되었는데 내가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일을 추진한 실장님은 나에게 회장 직함을 주셨다. 이름 하여 ‘대한민국 청년 예술의 힘’이라는 전시가 올해에 열릴 계획이었다.
“ 그리고 무슨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다면서요. 축하해요.”
작년에 내서 입선을 했던 세계평화 미술대전에서 비구상 부분에서 얼마 전에 대상을 받았다. 뛸 듯이 기쁜 일이었다. 3학년 여름방학 때 식음을 전패하고 그렸던 그림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고된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상금이 크진 않았지만 그 상금으로 친구들과 회포도 풀었다. 누구보다 주현이가 기뻐해 주었다. 나는 기뻐해 주는 주현이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더 좋은 성과로 우리의 미래에 밝은 빛을 드리워 줄게라고.
“ 네. 운이 좋았습니다.”
“ 운칠기삼이라고 했어요. 운도 실력이야. 아무튼 반가웠고 고마워요. 훌륭한 화가가 돼서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줘요. 나 같이 되지 말고.”
“ 무슨 말씀이세요? 선배님도 저희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주신 선배님입니다. 동수 선배한테 다 들었어요. 미대 재학 시절 누구보다 뜨거운 사람이었다는 것을요.”
“ 언제 적 얘기예요? 아무튼 동수나 바꿔줘요.”
1회 선배님하고의 대화는 그렇게 끝 이 났다. 진귀한 경험이었다. 선배님들과의 조우가 처음인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휴학과 띄엄띄엄 학교를 다니다 보니 동기들 과도 서먹한 사이였던 나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같은 동문이라는 이유로 엮인 끈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동수 선배 하고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는데 시간이 늦었다며 택시를 타고 가라고 택시비를 주셨다. 급구 사양을 했지만 본인이 잡아서 이렇게 늦어진 거라며 택시비를 택시기사님에게 주셨다. 그래서 편하게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며칠 이 지났다. 임 교수님이 호출을 해서 연구실로 찾아뵈었는데 레지던스 이사라는 사람이 조금 있다가 온다는 것이었다.
“ 주민이 네가 만나서 이야기를 잘해봐.”
“ 그러니까 그림을 사고 싶은데 연결을 잘해달라는 거죠.”
“ 주민이 너 전화번호 알려 줬으니까 아마 전화가 직접 갈 거야.”
임 교수님은 작년부터 학과장에 취임하신 후로 그 전과는 다르게 학생들과 소통도 많이 하시고 활발한 대내외 활동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계셨다.
“ 너한테 다 일임한다고 했으니까 일 잘 보고. 알았지?”
대화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담배를 피우려고 9 강의 동 로비에 있는 자판기로 간다. 참, 성범이 형과 많이도 뽑아 마신 자판기 커피. 이제 이 녀석과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커피를 뽑아 현관에 나서는데 날씨가 참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좋은 날씨였다. 학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학교에는 졸업 전시 심사에 통과하지 못한 녀석들만 남아서 작품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도 상황이 되는대로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일을 하는 날 말고는 학교에 매일 같이 나와 작품에 매진하고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받아 보니 그 이사님이었다. 조금 전에 외제차가 한 대 들어오는 것을 봤었는데 그 차의 주인인 듯싶었다.
“ 유주민 학생 핸드폰 맞습니까?”‘
“ 네. 제가 유주민입니다”
“ 교수님이 이 번호를 알려 주셨거든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어요?”
“ 안 그래도 지금 로비 앞에 나와 있습니다.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이사님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저희 레지던스는 외국인들이 장기 내지는 단기로 머무는 곳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림 때문에 컴플레인이 많이 들어와서요.”
“ 무슨 불만들이 그렇게 많은 건데요?”
“ 출력된 그림들을 걸어놨다고 자기네들 문화 수준을 무시한다고 아주 난리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성 작가 작품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삼각지 그림도 싫어해서 사다가 걸 수도 없습니다.”
작품 값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으신 이사님에게 작품 값이 매겨지는 개념에 대해서 조금 설명드려야 했다. 통상 미대를 졸업한 작가들의 작품 가는 호당 5 만 원 정도다. 큰 상을 받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하거나 유학을 갔다 오거나 통상 커리어가 올라가면 그에 따라 그림 값이 올라가는데 개인차가 심해서 나중에는 그저 부르는 게 값이 된다. 기준이 있다면 국전 기준으로 특선이면 10만 원 대상이면 30만 원 정도 받는 것이 통상 적인 기준이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25점에서 30점 정도 필요한데. 예산은 250 만 원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레지던스가 방이 그리 크지는 않죠?”
“ 그렇습니다. 원룸 만 한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그러면 그렇게 큰 그림도 필요하지 않겠네요.”
“ 그렇죠. 큰 그림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통상 학부 졸업생들의 가격은 호당 5만 원 정도 하는데 공모전 수상 경력과 전시 경력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그림 값이 올라가지만 학부생들은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그림 값을 많이 받을 수는 없다.
“ 그러시면 호당 5만 원으로 해서 2호짜리로 25점으로 맞춰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액자 비는 저희가 부담하는 것으로 하죠. 1호 크기가 엽서 정도의 크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호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액자, 마트에다가 프레임까지 들어가면 아마도 적당한 크기가 될 것입니다. 시간은 열흘 정도 주시지요. 그림 제작하고 말리고 액자 하는 시간까지 그 정도는 걸립니다.”
“ 정말요? 고맙습니다. 거절당하지 않을까 걱정 많이 하고 왔는데 고맙습니다.”
실은 수원대에 갔다가 망신만 당하고 왔다고 말하셨다. 내가 중간에서 조율을 잘해준 거 같다면서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는데 일단, 나는 선수금으로 50프로를 달라고 요구를 했다. 왁구에 재료비에 액자 공장도 알아봐야 하고 돈이 들어갈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후배 녀석들을 섭외를 했다. 손이 적당히 빠르면서 각자의 스타일들이 있는 녀석들로 말이다. 하다 보니 다 남자 후배들이 됐는데 액자 공장을 알아보고 계약하는 일은 후배 녀석들에게 맡겼다.
다섯 명이서 다섯 점씩 그리고 50만 원씩 가져가면 될일 이었다. 여기서 n분의 일로 액자 비는 내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쉽게 작업하기 위해 비구상 작품을 했다. 오공 본드와 핸디코트를 섞어 두꺼운 질감을 낸 화면에 밝은 배경색을 입히고 물방울이 맺힌 나뭇잎을 그려 주었다. 각자의 개성에 맞게 그려진 그림들은 다양해서 넘겨줄 때 기분이 좋았다. 액자도 적당한 가격에 할 수 있어서 개인당 40 만 원 정도 씩 가져갈 수 있었다. 열흘 동안 그림을 그려 받은 돈치고는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이렇게도 팔 수 있구나.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렇게 학기는 끝나고 또 방학이 찾아왔다. 4학년 1학기는 그림만 그리다가 끝난 학기가 됐다. 대상도 받고 인사동 화랑에 캐스팅도 되고 좋은 일들이 많았다. 대중들이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이 많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여서 졸업과 동시에 작가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하고 있었다. 경매시장에서는 연신 최고가 기록이 쓰이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젊은 작가의 비중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림을 매일 같이 열심히 안 할 수가 없는 시기였다. 물론 경륜 장일도 게을리 하진 않았다. 사모님 딸도 어느덧 입시생이 되어 죽음의 특강을 보내고 있었다. 시각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된 녀석은 부쩍 실기도 많이 늘어 있었다.
사모님을 통해 고액 과외 자리가 하나 들어왔었는데 한국예술 종합학교를 희망하는 친구여서 내가 맡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학교에서 만난 성민이 형한테 연결해 주었다.
셩민이 형은 졸업을 한 후, 내가 일했던 설비 일을 넉 달 하다가 일을 쉬고 있어서 나름 타이밍이 좋았다. 한국예술 종합학교 최종 면접에서 너무 솔직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형은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입시생에게 도움을 주기에 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