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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엄버 Sep 12. 2022

43화. 비상상황.

43화. 비상상황.

43화. 비상상황.


 순조롭게 보내던 일상이었는데 사건이 하나 터졌다. 가락국수를 파시는 아주머니 남편이 감기 몸살로 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알고 보니 간암 말기였고 3일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아주머니 남편은 사업을 하셨는데 평소에 술과 담배는 일절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하셨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었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주머니 아들 둘은 둘 다 군대에 가있어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아주머니도 경황이 없어 보였다. 나와 은식이는 일하는 곳에 메여 있어서 문상도 가지 못했다. 사모님과 사장님만 갔다 오셨는데 하필 일을 하는 3일 동안에 상이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죽음으로 아주머니는 할 일은 많아지셨다. 공장을 정리하고 밀린 직원들의 월급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아주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아주머니의 경륜장의 공백을 매워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눈앞이 깜깜했다. 일단, 아주머니의 복귀 시기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다른 아주머니를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취사반 경험이 있는 은식이가 가락국수를 맡아서 팔기로 했다. 자판 기일은 내가 전담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적당히 카운터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머릿속에 번뜩하고 남원이가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녀석과 통화를 했는데 임상실험 알바를 했다고 녀석은 나에게 고백을 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를 다니는 과정에서 엄마가 김밥 집을 차리셨는데 갑자기 김밥집이 망하는 일을 겪은 녀석은 좋아하던 음악도 접고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평범한 4학년의 모습이었다. 이 녀석 역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 보니 나하고 같은 학년이었다. 학과 수업을 다 마친 녀석이어서 잠깐 도움을 주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해 연락을 했다. 

 “ 남원아. 잘 지내지?” 

 “ 잘 지내지. 요즘 취업한다고 토익 공부하는데 안 하다가 하니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힘드네.” 

 “ 너 돈은 필요하지 않냐?” 

 “ 돈은 언제나 필요하지.”  

 “ 그래서 말인데. 너 내가 일하는 경륜장에서 며칠만 알바 안 할래?” 

 “ 며칠? 며칠이면 되는데?”  

 “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여기 일하시던 아주머니가 남편 상을 당하셔서 말이야.”  

 “ 그럼 상 치르는 동안만 하면 되는 거 아냐?” 

 “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잘 모르겠다. 남편 사업체 정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거 같더라고.”  

 “ 그렇게 오래 하지만 않은 다면 내가 할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금, 토, 일 3일만 하는 거니까 공부하는데 그렇게 방해되지도 않을 거고. 책 가지고 와서 봐도 돼.” 

 “ 그럼. 한 번 해볼까?”

 남원이는 전에 화실에서 은식이 와도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불편한 사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남원이가 와서 일해주면 딱 이었다. 


 생각보다 남원이는 일에 잘 적응해 주었다. 하지만 녀석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다른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하던 일이 망해서 남원이네 엄마도 개인 파산을 알아보고 계셨는데 그 과정에서 부모님이 이혼하시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언젠가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는 금호동에 살면서 마당이 있는 2층 집에 살었었는데 굉장한 부자였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저와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쉽게 접 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부유했던 녀석이 현재 처해져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난 안타까웠다. 꿈을 접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현실 앞에 음악 평론가가 꿈이라며 반짝이던 눈빛은 이제 그만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녀석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 남원아. 내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듯이 너도 음악을 포기하지 마.”

  카운터 뒤 세어서 멍하니 서 있는 남원이에게 내가 말했다. 

 “ 포기 안 해 인마. 걱정하지 마. 하지만 일단, 취직은 해야지.”

 “ 그래.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나중에 열매는 달콤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예술을 위한 삶은 죄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림쟁이나 딴따라라고 비하들을 하지만 주변에 누구 하나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 무모한 길을 우리는 가고 있는 것이다.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 힘들지만 꿈을 꿀 수 없는 것 자체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더 지옥과 같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그 길을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방학 기간에도 학교를 나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졸업전시 작품은 다 완성이 되었지만 공모전과 내년에 있을 작가 공모를 준비해야 할 작품 등 구상했던 작품들을 계속해서 그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무더운 날씨에 스쿨버스도 다니지 않는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 제일 고역이었다. 그나마 같이 그림을 그리는 승완이가 매일매일 꼬박꼬박 나와 주어 같이 도시락도 먹고 맥주도 한 잔 하며 그동안 친해지지 못했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외롭지 않은 시간이었다.

 녀석은 입시미술학원 강사를 하다가 졸업반이 되면서 학원을 그만두었다. 승완이는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부인과 자식이 딸린 유부남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말을 하던 녀석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내가 아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이 어린 부인이 애를 데리고 친정집으로 갔다며 맥주를 마시다가 말고 눈물을 쏟는 녀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사뭇 당황을 했지만 녀석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위로를 해줬다. 그러면서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 졸업전시 그림만 통과되면 지방으로 내려가서 막일이라도 뛰며 일할 거라고 말을 했다. 아버지 아시는 분 중에 대학 졸업장 들고 오면 현장 소장시켜준다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지방에서 일해서 잘은 못 올라오겠지만 월 300 벌이를 하며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녀석은 마음을 다 잡은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내 눈에는 피눈물로 보였다. 언제나 선한 마음과 표정으로 매사를 대했던 녀석이 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녀석이 졸업 후에도 그림을 그리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해 보였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사는 녀석이었는데 앞으로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길이 훤히 보였다. 나 역시 설비 일을 하며 여러 현장을 전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래 보였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던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도피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녀석을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보면 네 옆에 부인과 자식이 다가와 있을 것이라고 녀석을 위로해 주었다.    

 예상보다 아주머니의 복귀는 요원해 보였다. 사모님과 자주 연락을 하시는 모양이었는데 공장을 정리하고 체불된 임금도 지급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아주머니는 변호사를 사서 일을 보고 계셨다. 아들 중 누구라도 같이 일을 헤쳐나 갈 수 있었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 군대에 있는 아들들은 별 다른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상황이 그렇다가 보니 남원이의 도움을 더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계속 부탁을 하기에도 상황이 애매했다. 녀석은 정식으로 직장에 취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남원이는 취직이 되었다. 안산에 있는 무역회사였는데 영어가 전공인 남원이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얼마 전에 선생님 화실에 갔었을 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다니는 것을 봤는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경제학과 4학년인데 휴학을 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림을 전공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녀석이었다. 영국 어학연수까지 다녀와서 다른 친구들보다 학교를 오래 다니게 된 녀석인데 입시를 다시 해서 미대를 간다니 용기가 가상해 보였다. 그림 실력을 보니 표현력은 좋았지만 실력은 미천했다. 그래서 그날 입시미술의 기본기를 보여주면서 입시를 할 거 같으면 반드시 입시 학원에 가라고 조언을 해 주었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은선이다. 이 녀석은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 피울 때 보면 세상의 시름을 다 본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아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24세라는 나이에 다시 진로를 고민할 수는 있다. 본인의 끼와 재능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은 부모님이나 타인의 입맛에 맞춰왔기 때문 일수도 있다.

 녀석의 고민은 2주 정도 갔다. 다행히 친구 아버지께서 투자를 해주신다고 해서 입시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녀석도 생활비에 용돈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락을 해봤다. 토요일 오후 하고 일요일에만 가능하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녀석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운 비상체제에서 어떻게든 단기 인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든 매일매일의 상황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극적이었던 사모님도 예전보다는 더 일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바뀌셨고 은식이도 어느덧 가락국수와 짜장을 파는 일에 익숙해졌다. 온전히 자판기는 내 몫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피크 타임에 와서 일해 주는 은선이 역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3 개월 정도가 지나서야 아주머니는 돌아오셨다. 극적인 귀환이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특강에 들어가는 미술학원의 수업 때문에 은선이가 더 이상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완전체가 되었다. 아주머니가 오셔서 다시 본인의 위치에서 일을 해주시니 모든 것이 수월했다. 

 오랜만에 회식을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활어 회를 좋아해서 언제나 회식 메뉴는 회가 된 지 오래다.

 가까운 횟집에서 간단하게 소주를 마시며 회식을 했다. 회 한 접시와 매운탕까지 먹고 나면 아주머니와 사모님은 집으로 들어가신다. 집에 가서 집안 일도 해야 하고 사모님은 자식들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0 만 원 정도 회식비를 주고 가신다. 그러면 우리는 맥주도 한 잔 하고 노래방도 가고 늦게 까지 놀다가 들어간다. 주로 차가 끊긴 상황이기 때문에 오늘 같이 회식이 있는 날이면 은식이는 우리 작업실에서 자고 내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다. 얼마 만에 평화로운 날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서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없고 주말이면 빡빡하게 일을 하느라 또한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집에서 늘어지게 밀린 잠이나 자야겠다. 



 4학년 2학기 개학을 하고 두 달 정도 지나고 나면 나는 졸업 전시를 한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 청년예술의 힘’이라는 전시도 준비되어 있어 그 전시 또한 준비해야 한다. 인사동에 위치한 11개 갤러리가 참여한 전시인데 전시가 끝나고 나면 갤러리에서 전시를 지원할 작가를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어떻게 보면 졸업전시 보다 나에게는 더 중요한 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시 중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작품을 한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야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변변한 카메라가 없어 학교 친구한테 부탁을 했는데 이 녀석도 카메라를 장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뉴얼을 잘 모른다고 했다. 전에 졸업 작품 사진을 찍을 때 사진작가님한테 작품 사진 잘 찍는 법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날 밝은 날에 그늘에서 찍는 것이 제일 좋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실행에 옮겼다. 해가 좋은 날에 그늘이 좋은 곳에 작품을 옮겨 놓고 그간 그린 그림들을 모두 사진에 담았다. 디지털카메라가 좋은 게 찍은 사진을 바로바로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는 점이다. 모두 꼼꼼하게 확인하고 사진 인화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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