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졸업
도록을 그렇게 감수를 많이 했음에도 오탈자가 나왔다. 송재현 교수님의 이름이 송재연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1000권의 도록에 작은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스티커야 그냥 붙이면 될 일이었지만 그렇게 많이 봤는데 오타를 다 찾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속이 상했다.
졸업 전시보다 먼저 있었던 ‘대한민국 청년예술의 힘 전’은 흥미로운 전시였다. 역시 각 학교에서 선발된 학생들의 작품들은 대체로 다 보기에 좋았다. 전시가 이루어졌던 전시장은 부남 미술관이라는 전시장이었는데 관장님의 이력이 특이했다. 한국요가협회 회장님이었는데 넓은 전시장을 무료로 내어 주시고 오프닝 부대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까지 비용을 대 주셨다. 나는 회장라고는 하지만 딱히 해야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뒤풀이 자리가 계속되는데 전시를 같이 보러 온 주현이도 합석을 하게 됐다. 젊은 작가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작업 관에 대해서 토론도 할 수 있고 나름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참여한 학생 중에 눈에 띄는 학생이 둘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전남대학교 대표로 온 이승무라는 사람이었고 한 명은 강남대학교 대표로 나온 최영규라는 사람이었다.
승무라는 사람은 특유의 표정과 진지한 성향이 눈에 들어왔고 영규라는 사람은 뭔가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언변이 좋아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여했던 작가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안 보이던 분이 와 계셨다.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분이다. 본인을 자하문 미술관 관장이라고 소개를 했다. 롯데 갤러리에서 책임 큐레이터를 오랜 시간 하셨다는 관장님은 직접 학교를 다니며 학생을 선발하기도 했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학교 같은 경우에는 송 교수님의 추천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송 교수님이 나를 추천한 것이었다.
자리가 파하고도 관장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전문가에게 포트폴리오를 보여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겨져 늘 지니고 다녔던 포트폴리오를 보여 드렸다. 내 작품에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셨다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전시 이후에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덕담도 잊지 않으셨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우리는 막차를 놓쳤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여관을 잡아서 자야 했는데 종로 쪽으로 가니 허름한 여인숙이 많았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다 보니 일부러 허름한 곳을 찾은 것이었는데 정말 쓰러져갈 듯이 허름한 여관이었다. 주현이와 예전에 여관을 전전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참 많은 일들을 함께 주현이와 겪어오고 있었다. 여관방에 들어와 몸을 누였지만 생각이 많아서 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지나 졸업 전시 날이 다가와 있었다. 오래전부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전시장이 좁아 그림을 다 걸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학생이 열 명이나 늘었으니 당연히 전시장은 학생들 그림을 모두걸기에는 부족했다. 한두 사람이 양보를 하면 될 일이었는데 고민 끝에 내가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대상을 받았던 그림을 걸고 싶었지만 변형 50호 그림을 전시장 데스크 위에 그림을 거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작품의 위치를 정했지만 보다 좋은 자리에 그림을 걸고 싶은 일부 학생들과 학부모가 욕심을 내면서 한때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누군가가 통 크게 양보를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양보하면서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졸업준비위원장이다 보니 진행을 보는 사회자 역할도 내가 해야 했다. 간단한 다과와 와인을 준비했는데 와인을 따는 도구가 없어서 고생을 해야 했다.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와인따개를 준비하지 못했다. 주현이가 어디서 와인따개를 구해 와서 늦지 않게 행사를 준비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럴 때마다 주현이가 도와주어서 일이 해결되니 우리도 참 천생연분이다.
그렇게 정해진 식순이 다 끝나고 오랜 시간 준비했던 졸업 전시가 끝이 났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전시 오프닝을 마치고 식사를 하는 자리로 옮겼다. 만두전골 집이었다.
인사동에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그리 많지 않다. 이곳 같은 경우도 6 개월 전에 미리 예약을 했기에 오늘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만두전골로 적당히 배를 채우고 2차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인원이 많았다. 졸업을 하는 당사자만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들까지 남아 전시의 오프닝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오늘 먹고 마시는 비용은 졸준위가 관리하는 돈에서 지불된다. 돈을 많이 아껴 쓴 탓에 예산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지출을 하는 일에 부담은 없었다.
3차 정도 되니까 친구들과 가족들은 다 빠져 보였다. 피맛골 안에 있는 호프집으로 갔는데 시간을 보니 이미 새벽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아쉬운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박 교수님도 아직까지 남아서 술을 드시고 계셨다.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덕담을 해주고 계셨는데 나에게도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같이 앉아있던 주현이에게 말을 하셨다.
“ 아가씨. 우리 주민이 버리면 안 돼요. 알았죠?”
“ 무슨 말씀이세요?”
“ 주민이가 큰 화가가 될 놈인데. 돈을 잘 못 벌 수도 있고 작품 안 된다고 속 썩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가씨가 잘 붙들어주세요. 그러면 주민이는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는 녀석입니다.”
“ 교수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학교를 다니는 내내 칭찬 한 번 안 하시던 분이셨는데 오늘따라 왜 그러시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교수님 말씀 무슨 말씀인지 잘 알 것 같네요.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림을 고집스럽게 그리고 주현이 더러는 잘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 그리고 주민이 너는 알바 좀 하지 마라. 부모님께 말 잘해서 그냥 그림만 그리면 안 되겠냐?”
우리 집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박 교수님이 본인처럼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 쓰면서 그림을 그리라는 말인데 나는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주시는 말씀이 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상황도 사람도 다 다른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게 덕담을 해주시고는 비틀거리며 박 교수님은 자리를 뜨셨다.
밤새도록 몇 명만이 남아 술을 마시며 우리의 졸업을 자축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첫차가 다니는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며칠이 지났다. ‘ 대한민국 청년 예술의 힘’ 전시를 기획했던 박 편집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 말이 있으니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박 실장님은 어디로부터 인지 잘은 모르지만 투자를 받아서 새로운 잡지를 만드는 일을 진행하고 계셨다. 전에 만들던 잡지는 단순하게 전시장에서 무슨 전시가 있는지를 소개하는 정도였다면 이번에 만드는 잡지는 전에 것보다 스펙트럼이 넓었다. 쉽지 않은 도전처럼 보였다.
박 실장님이 안내해준 곳으로 박 실장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막상 가보니 높은 빌딩이었다. 시간 때가 점심식사 시간이 어서 같이 일하는 직원들은 식사를 하러 나가서 자리에 없었다.
“ 어떻게 하다 보니 점심시간에 부르게 됐네요. 식사는 했어요?”
“ 네 집에서 간단하게 먹고 나왔어요.”
“ 나는 컵라면 하나 먹을까 하는데 괜찮죠? 전날 술 많이 먹으면 나는 이것밖에 생각이 안 나.”
“ 컵라면으로 해장이 되세요?”
“ 나는 이게 제일 잘 돼요.”
“ 신기하네요. 저는 냄새도 맡기 싫던데.”
“ 다름이 아니라 주민 씨 오늘 시간 괜찮죠?”
“ 네. 별일 없습니다.”
“ 그럼 조금 있다가 낮술 한 잔 해요.”
하실 말씀이 있다고 했다.
사무실을 나와 인사동에서 전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다. 학교를 다닐 때 주현이와 성범이 형과 같이 전시장도 참 많이도 돌아다녔었다. 졸업 전시 시즌이어서 그런지 큰 전시장마다 졸업 전시로 한창이었다. 오랜 시간 학교 생활을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생스러운 순간들도 많았지만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전시장을 돌고 있는데 박 실장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주민 씨. 어디에 계신가?”
“ 네. 그냥 전시장 돌아보고 있었어요.”
“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은데 술 한 잔 합시다.”
“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설명을 하시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낙원상가 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 모퉁이에 보면 허름한 횟집이 있다고 했다. 이쪽으로 오라고 하셨다.
약속한 곳으로 가보니 이미 와 계셨는데 일행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갤러리 실장이라고 소개를 했다. 부모님이 30년 넘게 경영을 하시는 갤러리에서 일을 한다고 했는데 미국에서 미술경영을 전공한 유학파였다. 내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며 앞으로 잘해보자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큰 상을 받고 학교를 대표에서 전시도 하고 이렇게 좋은 기회까지 얻게 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이들의 술 먹는 방법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폭탄주를 마시면 맥주와 소주의 비율을 7:3 정도로 하는데 이분들은 비율을 같으나 주종의 달랐다. 소주가 7이고 맥주가 3인 것이다. 술이라고 하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편인데 몇 잔을 받아먹으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술을 마시는 와중에 꿈 갤러리 관장님이 동석을 하셨다. 이 세분은 단짝처럼 보였다. 연배는 조금 달랐지만 술 마시는 습관 하며 관심사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도 비슷해 보였다.
2차로 당구장에 가자고 했다. 사람이 네 명이니까 편을 갈라 치자는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와 당구장을 몇 번 간 것이 당구장 경험의 전부였기 때문에 꺼려졌지만 당구는 치면서 배우는 거라는 말에 못 이기는 척 같이 당구장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잡은 큐대도 큐대지만 술을 많이 마시고 와서 그런지 공이 아예 맞지가 않았다. 나는 당구 치는 방법을 누군가에게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는데 역시 미천한 경험은 우리 편에게 엄청난 리스크로 작용했다.
계속해서 다른 편 공을 맞추는 파울을 범하기 시작하니까 백 실장님이 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백실장 님과 나는 한편이었다. 신기한 게 치라는 요령대로 치기 시작하니까 공이 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당구를 쳤는데 내가 갑자기 선전을 하면서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다.
갈 길이 먼 나는 먼저 자리를 일어나야 했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는데 백실장 님은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연락처를 주고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졸업 전시까지 끝나고 나니까 학교에서 할 일이라고는 제2 외국어 수업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학번이 높다는 이유로 예전 학칙이 적용되어 제2 외국어를 두 과목 이수하면 외국어 점수를 채울 수 있어서 졸업이 가능했지만 최근에 들어온 후배들 같은 경우는 영어 시험을 보거나 아주 어려운 영어 회화수업을 이수하여야만 졸업이 가능했다. 영어 공부를 고등학교까지만 한 나로서는 다행인 상황이었다. 이 외로운 수업을 같이 들을 수 있는 녀석이 있어서 그마저도 다행이었다. 명관이가 고생 끝에 재 입학에 성공해 1학년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 녀석의 인생도 나 못지않게 꼬여있었다. 그나마 재입학이 가능하여 다행이었다.
술집을 하다가 크고 작은 사고로 인해 문제들이 많이 생겼었는데 다른 것보다 음주 운전으로 말썽을 피우다 보니 가게를 잘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많은 손해를 보지 않고 술집을 넘길 수 있었지만 녀석의 방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가게가 잘 되면 친구에게 맡기고 학교를 다니려 했던 녀석이었지만 모든 일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방황하는 녀석을 붙잡아준 것은 그래도 다름 아닌 여자 친구였다. 학교 동기라고 소개를 해주었지만 1학년을 제대로 보내지 않는 내가 알리가 없었다. 이 친구도 재수로 학교를 들어와 나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그렇다 보니 주현이와 친해지게 되었다. 때때로 자주 만나 술을 마시며 친목을 도모하는 일들이 있었는데 회를 거듭할수록 명관이의 여자 친구 소희는 주현이와 제법 친해지게 되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중국어 수업을 그것도 야간으로 들었는데 그래도 명관이랑 학교에서 저녁식사도 같이 하고 수업도 같이 듣고 명관이가 서양화 수업을 들을 때 내 재료도 빌려가기도 하고 제법 학교 생활하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학기는 끝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