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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엄버 Sep 12. 2022

45화. 이사.

45화. 이사.

45화. 이사. 



 이번 겨울은 돔구장이 완공이 되면서 경륜장 매점은 혹한기의 휴업은 피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은식이가 4학년이 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집에서 통학거리가 2시간이 걸리다가 보니 학교 앞에서 친구들하고 자취를 하며 졸업을 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은식이도 졸업을 준비하는 마음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렇게 은식이와의 경륜장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다른 알바를 구하지 않았다. 공단과의 계약기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였기도 하고 일이 익숙해져서 굳이 한 명을 구하고 교육시키고 그런 과정 자체가 지난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의 월급은 많이 올랐다.

 대선이 결과가 안 좋았기 때문에 5월이 되면 사모님은 매점을 정리해야 했다. 나는 지금부터는 학교를 갈 일도 없는 사회인이 되었고 그림 작품을 매일 같이 해야 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작업실도 필요했다. 일단은 선생님 화실에 짐을 옮겨놓고 그곳에서 한 동안은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화실로 그간 학교에서 그린 그림을 짊어지고 다시 들어왔다. 그러면서 주현이도 화실로 같이 나와 그림을 그리게 됐다. 그렇게 된 이유가 또 있었는데 어느 날 서울서 일한다는 주현이 오빠가 우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나셨는데 동생이 사귀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보고 싶었던 것도 찾아온 이유였지만 우리가 사는 작업실을 보고 싶어서 이기도 했다. 소고기를 사주시고 홀연히 떠나셨지만 후폭풍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현이 오빠는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살고 싶어 서울에 집을 얻어서 부모님이 들어오시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형님의 부탁을 거절하셨다. 서울이어서 좋았지만 월세여서 싫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오랜 셋방살이를 하시다가 평촌 신도시에 자리를 잡고 사신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제2의 고향 같은 집과 고장을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불똥은 우리에게 튀었는데 당시 우리 보증금과 형님이 모아 놓은 3000만 원으로 인천에 작은 빌라를 사자는 것이었다. 곧 재개발이 예정되어있는 곳이 었는데 아직 소문이 많이 나지 않아 가격은 지금 사기에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도시 재개발이 논의되는 곳들이 많아 사람들이 너도 나도 부동산 재테크를 한다고 골몰하던 시기였다. 우리도 잘은 몰랐지만 그 재테크 행렬에 합류를 하게 된 것인데 그러면서 눈곱만큼도 생각해 보지 못한 형님과의 동거가 시작이 된 것이었다. 모든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게 된 일에는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리 윗 집에는 할머니가 혼자서 사셨는데 옥상을 불법으로 개조를 한 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할머니가 안 보이가 시작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서 우리는 할머니의 부재가 우리에게 어떤 재앙이 될지 모르고 잘 생활하고 있었다.

 봄이 오면서 얼었던 얼음이 녹았다. 윗 집 할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할머니가 살던 집 난방수는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 관 안에서 얼어붙어 있었고  봄이 오자 온 돌 밑에 설치된 난방수가 들어있던 관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찢어지게 되었다. 비만 오면 어떻게 빗물이 스며드는지 우리 집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세숫대야를 받쳐 놓고 일단, 새는 비가 방안을 흔건하게 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상황을 말해보니 윗 집의 문제니까 윗 집주인에게 가서 따지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수소문 끝에 윗 집주인을 만날 수는 있었지만 그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윗 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시며 요양원으로 자식들이 모시게 됐고 갑자기 일어난 일이다 보니 집주인도 모르게 집은 비워져 있었던 것이었으며 집주인은 정치에 입문을 하겠다고 전 재산을 전부 날리고 개털인 상황이었고 물론 우리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생활하기에 불편하지도 않은 것이 비가 올 때만 물이 새는 것이었고 봄이라 비가 자주 오긴 했지만 많은 양의 물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 불만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든 환경에 적응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필 형님이 집에 오신 그날에 물이 떨어지고 있었고 형님은 경악을 했다는 후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은 흘러 인천에 살집이 계약되고 우리도 운 좋게 다른 세입자를 구해 살던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양심에 찔려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사실을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에게 알렸는데 본인은 집에서 잠만 자면 된다고 괜찮다고 했다. 쿨해도 너무 쿨한 사람이었다. 

 서울로 하는 이사는 지난했다. 사다리차를 이용할 수 없는 구조의 옛날 빌라여서 모든 짐을 사람이 지어 날라야 했고 처음 견적을 보신 이삿짐 사장님은 사람과 차가 부족하다며 차 한 대랑 사람 두 명을 더 불러야 된다고 했다. 

 그러고도 이사하는 집이 골목이 좁아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사다리차를 다시 접고 잠깐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상황이어서 난처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일하시는 분들이 너무 고생을 하니 돈도 돈이지만 진심으로 미안했다. 미안한 만큼 돈을 더 얹어 주었다. 이사는 해가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다. 대부분의 그림 재료에 그간 그린 그림들까지 짐은 점점 늘어 처음 작업실을 차렸을 때의 두 배의 양으로 늘어 있었다. 


 그 사이 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자가용이 없던 우리는 지각을 해서 졸업식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학사 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일은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몇 안 남은 동기 녀석들과의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돈이 없는 관계로 졸업앨범은 구매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도 졸업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졸업을 한다고 바로 취직이 잘 되는 학과도 아니거니와 준비도 미흡한 상황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 역시 뾰족한 수 없이 경륜장 일을 병행하면서 공모전이나 작가 공모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찾는 방법 말고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졸업 동기들과는 다르게 같이 일을 해보려는 화랑도 만났고 박 실장님도 내 작품에 많은 응원을 해주시고 계시고 주현이와 같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하지만 내 의지하고는 다르게 부모님은 내가 취업하기를 바라셨다. 그림은 취미로 하고 직장생활을 하기를 권하셨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도, 전국에서 모은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회장이 되어도, 그리고 전속을 하자는 화랑이 생겼는데도 부모님은 단순히 취업을 권하시는 모습에 나는 단단히 화가 났다. 반드시 그림으로 성공해서 부모님의 생각을 잘못인 것임을 입증해 보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나의 그림 생존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청년예술의 힘 전]을 마치고 청년들은 작은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나는 회장이었기 때문에 다음 전시를 기획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박 실장님에게 의견을 물어보니 부남 미술관 관장님에게 한 번 부탁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34명의 학생들이 전시에 참여했지만 모두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 전시 공모를 했다. 전시 기획과 전시 내용 같은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전시를 설명할 수 있는 전시면 된다고 생각하고 의견을 물었다.

 어느 한 회원이 다음에 카페를 만들어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전시 공모도 이 카페를 통해 했다.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주기적으로 작가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총무가 정해졌는데 그가 바로 전남대학교 출신의 이승무 씨였다.

 승무 씨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일에 치여 학교를 3년 휴학했던 반면, 승무 씨는 영국 유학을 갔다 오면서 3년의 공백이 생겼다고 했다. 음악을 좋아했던 승무 씨는 영국에서 재즈 작곡을 전공했다고 했다. 재즈 하면 미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전공을 하고 왔다고 하니 그저 믿어줄 따름이었다. 

 승무 씨와는 내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자주 보게 됐는데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그 점이 무척 좋았다.

 우리는 동갑이다 보니 친해지는 속도가 무지하게 빨랐다. 성장을 하면서 같은 시간대를 보낸 것이라는 점이 이렇게 친해지기가 쉬운 조건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만화 하며 음악, 영화까지 같은 나이에 동시에 접했기 때문에 의사소통하기가 너무 쉽고 편했다. 그리고 그림을 같이 그리다 보니 작업 방향이나 그림 성향 그리고 현재 미술계의 동향 같은 공통의 관심사들이 그를 계속 자주 만나게 했다. 


 학교를 졸업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에는 중요한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엄마가 개인 파산 판결을 받은 것이었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는데 판결을 받을 때는 주현이와 내가 엄마와 동행해 주었다.

 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은 고통이 많이 따랐다. 그간 채권단에게 받은 수많은 추심 그리고 협박 이 모든 자료를 증거로 만드는 과정은 지난했다. 25년 넘게 미용실 월세를 냈던 사실을 증명해야 했는데 건물주의 아들은 엄마가 월세를 잘 냈다는 인우보증도 서 주지 않았다. 세상이 참 야속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듯이 엄마는 파산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또 하나의 사건은 큰누나의 출산과 큰 매형의 서울 발령이었다. 첫 조카의 탄생은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큰 누나 네가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지내던 전셋집에 부모님이 들어가 살고 있었는데 재건축이 확정이 되면서 갑자기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큰 누나는 아파트 청약을 넣어 당첨이 되어 입주할 아파트가 있었고 안양에 올라오면서 그 집으로 들어가면 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는데 전셋집을 얻어야 했는데 돈이 부족했다. 갑자기 처한 상황에 난감했지만 다행히 엄마 아버지가 잘 알고 지내던 보살님이 큰돈을 빌려 주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생각이 났다. 그렇게 부모님은 극적으로 전셋집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졸업을 하면서 두 차례 받은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종중 땅이 팔리면서 나온 돈들을 자자손손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 있었는데 내 몫으로 들어온 돈은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있기에 충분했다. 조상도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을 주시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들은 닥친 위기를 잘 극복을 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다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작은 누나는 가베 선생님 자격증을 따서 학생들의 집을 방문해서 교육을 하는 방문교사로 그 사이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의 수학적 두뇌를 발전시켜주는 블록을 쌓는 방식의 교육인데 학부모들 사이에서 제법 소문이 나서 나름 돈을 잘 벌고 있었다. 오뚝이 식품에 다니는 나와 동갑내기와 교제를 하고 있었는데 나름 결혼까지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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