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KYA
46화. KYA.
졸업을 하고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된 나는 서울에서 안양과 산본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주중에는 안양 화실에서 작업을 하고 주말에는 경륜장에서 알바를 했다. 주말 같은 경우에는 내가 일을 하니까 주현이 혼자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내가 일을 마칠 때쯤 산본역 안에서 만나 같이 집으로 향하기를 반복했다.
청년 작가들과의 교류에서는 영국의 YBA같이 우리 단체의 명칭도 KYA라는 명칭을 만들어서 활동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영국의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일컬어 YBA라고 하는데 YOUNG BRITISH ARTIST를 줄인 말이라면 우리는 KOREA YOUNG ARTIST를 줄여서 KYA라고 명명하자는 것이었다. 영국의 경우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각 대학을 대표해서 나왔다는 자부심에 제1회라는 자부심이 더해진 작명이었다.
전시 준비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한 회원이 제안한 전시 제목은 [REMAKE CAN 展 ]이었는데 다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해이해진 작가들의 결속을 다지고 다시금 출발하자는 의미였다. 회원들에게 공모를 했을 때 나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안건이었기에 채택을 했다.
여럿이 모여서 전시를 한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작품이야 각자가 알아서 하면 되지만 외부적으로는 전시장을 대관을 해야 하고 도록을 제작해야 하고 제작한 도록을 되도록 각지에 있는 대학교와 미술관 주요 갤러리까지 발송을 해야 하고 오프닝 행사와 저녁 식사 그리고 간단한 뒤풀이까지 준비해야 되는데 해야 할 일이 졸업 전시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학교도 작업장도 서로 다른 작가들을 의지를 모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우선 부남미술관에서 대관은 무료로 해주시기로 했다. 비용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부분이 해결이 된 것이었다. 박 실장님에게 물었더니 부남 미술관 관장님께 말씀을 잘해주어 대관을 할 수 있었는데 단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내 그림을 한 점 기증하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림을 가져가는 것이 미안했는지 이사님이 50만 원을 챙겨주신다고 했다. 부남 미술관 정도의 갤러리를 대관하려면 250만 원 정도 비용이 소요되는 문제였는데 내 그림 한 점으로 퉁치자는 제안은 나름 달콤했다.
그리고 다르게 들어갈 부대비용은 참여하는 작가들에게 예상되는 비용만큼 N분의 1로 계산을 해서 걷었는데 이 역할을 총무인 승무 씨가 맡았다. 참여 작가는 15명 정도로 작년에 비해 절반 이상으로 줄어 있었는데 그래도 나름 의지들이 뻗쳤다. 다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들이었는데 나와 승무. 그리고 영규 정도만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준비 기간이 짧다 보니 전시와 같이 일을 보는 일이 피곤해 보였다.
이번 작품전에는 작품 사이즈를 작게 해서 지하철로 옮길 수 있었다. 나름 공모전 생각도 있는 작품들도 있어서 액자도 제작했다. 작가의 길로 한 발 한 발 나가는 것 같았다.
지인들만 불러 오프닝 행사를 했지만 역시 경험이 일천해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공을 많이 들인 것에 비해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비용만 드는 전시를 계속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회 전시 때는 언론에서도 조명을 하고 해서 나름 야심 차게 2회 전시를 준비했는데 홍보에 실패한 느낌이었다.
전시 마지막 날 그림을 찾으러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시장 이사님이 다급하게 전화가 왔다. 누가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며 사고 싶다는 것이 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는 부랴부랴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장에 들어서 보니 이사님이 조급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셨다. 그림을 사고 싶다는 사람은 응접실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을 따라 응접실에 들어가서 앉았다.
“ 유주민 작가님이 삽니까?”
“ 네. 제가 유주민입니다.”
“ 반갑습니다. 저는 작게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민 씨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사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 네. 그림을 구매하신다면 영광이죠. 어떤 작품을 좋게 보셨어요?”
그가 원하는 작품은 이번 소사벌 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다른 작품을 샀으면 했는데 소신은 완고했다. 그리고 그림을 한 점 더 사고 싶다고 했는데 전시 후에 부남미술관에서 나에게 50만 원을 주고 가져간 그림을 원했다. 이 그림은 경기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한 그림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림을 많이 사봤다며 내 그림 값은 호당 3만 원이면 충분하다고 말을 이어갔다. 당시만 해도 작품 판매를 통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거의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내 그림을 그렇게 사고 싶다고 하니 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그림을 가지고 지난한 협상을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가 산다는 그림 중 하나는 이미 부남 미술관에 소유였던 사실을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 그림의 대금은 부남 미술관에게 지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그림에 판매 대금도 미술관과 내가 5:5로 나누어 갖게 되는 사실도 잘 몰랐을 것이다. 고로 300만 원을 주고 그림을 두 점을 샀더라도 전에 그림 값으로 이미 받은 50만 원에 한 점 가격 150만 원의 절반 즉, 75만만 내가 손에 쥐는 것이었다. 이것이 갤러리와 작가 간에 공생의 관계라는 사실 또한 잘 몰랐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승무가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 주민 씨. 저 사람 재벌은 아닌 거 같은데?”
“ 그래요? 작게 개인 사업한다고 하시던데.”
“ 개인 사업하는 사람이 그림을 사다니 신기하네요. 혹시 사기꾼 일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 에이. 성공한 벤처 사업가 그런 분 아닐까요? 미술품을 좋아하는.”
“ 아무튼 우리는 내 그림 옮기고 주민 씨 그림도 팔리고 했으니까 내가 축하하는 마음으로 소고기 쏠 테니 오늘 술 한 잔 합시다. 참. 주현 씨도 불러요.”
실은 내가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승무와 빠르게 친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주로 인사동 일대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승무는 기혼자였다. 초등학교 때 옆집에 사는 여자 사람 친구와 절친이었는데 부모님들끼리 커서 결혼을 시키자고 약속을 한 것이 실행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정략결혼 같은 것이었다.
평창동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승무는 집이 잘 산다. 그러다 보니 친척들 중에 재벌가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옛날에 경상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자가 승무 할아버지였다고 하니 나로 써는 감이 안 오는 부분이다. 승무 아버지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미술품 수집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문화재급으로 보이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보존과 관리를 이제는 승무가 해야 할 몫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나보다 승무가 넉넉하다 보니 술을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우리는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걸 좋아했다.
전화 통화가 자주 오는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상무의 장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그런지 장인과의 사이는 눈에 띄게 돈독해 보였다. 상무가 너무 말라서 건강 걱정을 많이 하시는지 산해진미에 한약에 몸이 축나지 않기 위해 많은 애를 쓰시는 것처럼 보였다. 손자를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았는데 맨날 나를 만나 술만 마시니 어쩌면 내가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승무의 장인은 부동산 재벌이라고 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도 부동산 투자도 하신다고 하니 내가 짐작을 할 수 없는 분이셨다. 처남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딸과 사위다 보니 애지중지 하셨다. 승무의 부인도 미술을 전공해서 물감과 학용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디자인 팀장이라고 했다. 사회생활을 우리에 비하면 굉장히 일찍 시작한 편이었다. 그래서 도록을 만들 때 궁금한 점이 있으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하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어렸을 때부터 친구여서 그런가 말투는 마치 남자 친구와 통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무의 차로 상무의 그림을 옮기는 일을 도와주었다. 내 그림은 다 팔렸기 때문에 옮기고 자시고 할 일이 없어진 셈이었다. 주현이에게도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승무와의 약속이 있다고 나오라고 했는데 지금 그림을 많이 건드려놔서 정리를 해야 하니 둘이 같이 먹으라고 했다.
“ 주현 씨 못 나온대요?”
“ 네 그렇다 네요. 정리하는 대만 몇 시간 걸린다고 하네요.”
“ 그럼 어쩔 수 없죠. 주현 씨도 안 나오는데 소고기는 과하고 피맛골 고갈비 집이나 갑시다.”
이 피맛골 고 갈비 집은 학교 다닐 때 성범이 형과도 자주 오던 곳이다. 고갈비의 맛도 맛이지만 생막걸리의 맛이 일품이다. 딱 얼기 직전 같이 느껴지는 시원한 막걸리의 온도와 매콤하면서 고소한 고갈비의 조합이 일품이다. 이 가게의 특징은 들어와서 주문을 따로 하지 않으면 그냥 고갈비와 막걸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오는 손님이나 내어주는 주인이나 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굳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조합을 먹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게 주인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석쇠에 구워져 나오는 고갈비는 고등어의 특유의 비린 맛을 잘 잡았다. 적당한 온도에 잘 구워진 고 갈비는 막걸리를 부르는 맛이다. 살짝 비릿한 느낌에 고갈비와 막걸리의 신맛과 어우러지는 그 맛과 궁합은 더할 나위 없이 일품이다. 나는 이 맛에 이끌려 인사동에 나오는 날이면 일행들과 이곳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은 예전부터 가난한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예술을 논하며 우정을 길렀던 장소이다.
승무와 발걸음을 옮긴다. 피맛골로 향한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하게 그림도 팔고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