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굿바이. 경륜장.
47화. 굿바이. 경륜장.
며칠이 지나 경륜장에 알바를 나왔다. 사모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을 하신다.
“ 역시 예상은 했으나 재 계약이 안 됐어. 하지만 두 사람은 여기서 일하게 해 달라고 내가 담당에게 말 잘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 그럼 사모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 차차 쉬면서 고민해 봐야지. 뭘 할지.”
“ 아쉬워서 어떻게 해요. 정도 많이 들었는데.”
“ 그러게요. 저희만 남아서 일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당장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나마 월급이 많이 올라 작품을 하고 공모전과 작가 공모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돈을 조금 더 많이 벌자니 그림을 못 그리고 그림만 그리자니 수중에 있는 돈이 바닥을 보이고 균형을 잘 맞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직영으로 바뀌면 가락국수이며 짜장, 토스트까지 다 안 팔 거야. 두 사람 훨씬 편하게 일하고 월급도 더 많이 준다고 약속했어.”
사모님이 우리를 걱정해 주는 일은 너무나도 고마운 일이지만 나 역시 너무나 아쉬웠다. 오너 이면서도 일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항상 내 뒤에 은식이 뒤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은 나이는 많으시지만 참 귀여웠었다. 갱년기 여성이기에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그것도 창피해서 쳐다보지 말라고 앙탈도 잘 부리시고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이어지는 수다는 자칫 지루 할 수 있었던 경륜장의 일상을 재밌게 바꾸기도 했었다.
사모님 첫째 딸은 입시에 성공해 원하는 학교 원하는 학과에 진학을 하였다. 살짝 가족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제 이렇게 작별을 해야 한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 했던 옛 현인의 말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사모님이 운영하던 경륜장 매점은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경륜장에서 사무를 보는 직원들은 공무원들이다. 공무원들이 관리하는 속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일단, 조리를 한 식품은 전면 판매를 금지하게 되었다. 매출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위생관리가 어렵고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모든 조리 식품은 매점에서 퇴출되었다.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공단에서 직접 운영을 맡다 보니 매출보다는 리스크 관리에 더 집중했다. 하루에 적게는 1000명 많게 는 2000명이 넘는 인원들이 드나드는 곳이었으며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시간을 쪼개 쓰기 때문에 밖에 나가서 음식을 잘 사 먹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황금어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대신에 컵라면을 팔게 되었다. 그리고 네 명이 할 일을 둘 이하다 보니 힘든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락국수를 파시던 아주머니는 카운터를 보신 적이 전혀 없었다. 자판기는 더욱더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자판기를 도는 타임이 돌아오면 아주머니는 안절부절못하셨다.
그전에 매점을 운영할 때는 포스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포스가 들어와서 물건이 팔리는 현황이 고스란히 기록이 되었다. 처음에 포스 사용법을 인수인계받을 때 같이 했어야 했는데 나만 혼자 교육받게 되면서 나중에 따로 일을 하며 아주머니를 알려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밥 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식대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둘이 일을 하며 김밥 같은 것을 짬짬이 먹으며 일을 해야 하는 일도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그렇게 새 단장을 한 경륜장 매점에서 2주 정도 일을 하며 정신없이 지내던 나는 갑자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모님을 나가실 때 우리도 같이 나갔어야 했는데. 괜스레 남아서 못 볼꼴을 보고 나가는구나.’
우리는 2주를 일하고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단호했다. 아주머니도 내가 없으면 여기서 일을 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경륜장과 이별을 하게 됐다.
그 후 시간이 많이 남아 공모전 준비는 잘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백 실장남을 여러 차례 만나면서 작품 이야기를 했다. 백송화랑에서 준비하는 전시 때문이었는데 현재 내 작품이 아니라 변화를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동안 구상해온 술 시리즈 작업을 해야 했다. 유리잔에 비치는 술과 조명 불빛에 반사되는 형상을 접사를 찍어서 그린 그림인데 백 실장님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밝은 케이크 같은 것을 그려 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런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는 ‘환영과 실재’ 그림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백 실장님은 좀 더 가볍고 밝은 그림을 원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의견 차이를 느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실장 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술을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인사동에서 만나 간단하게 소주를 마시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투자자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불편하게 술을 마시는 곳으로 나를 불러냈다. 국내에 돌아가는 자신의 건설현장이 15개라고 자랑을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거들 먹 거렸다. 그의 행동과 말투는 누가 봐도 거슬리는 것 들 뿐이었다.
박 실장님도 같이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무슨 투자를 받고 싶으셨는지 애를 많이 쓰시는 모습이었고 백 실장님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수평선을 달리는 듯 한 술자리에서 백실장 님과 나는 빠져나왔다. 백 실장님은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디 약속 장소가 있다며 사케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사케 집에는 나와 같이 화랑과 같이 일을 먼저부터 하고 있던 선배 작가들이 두 분이 나와 계셨다. 한 분은 동양화를 하는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조각을 하는 분이셨다. 백 실장님은 작가들을 모아 놓고 뭔가를 이야기할 참이었는데 박 실장님한테 붙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 다들 모였으니까 건배합시다.”
느닷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작품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여서인지 대화는 잘 통했다. 술을 계속 마시는 과정에서 조각을 하는 여성 작가 분은 갈 길이 멀다며 먼저 일어나셨다.
여성 작가가 집에 들어가고 우리는 룸사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처음에 백 실장님이 룸 사롱을 참 좋아하시는 분 같다고 생각했었지만 몇 차례 따라다니면서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룸 사롱 사장님과 백 실장님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는데 학교 다닐 때 백 실장님을 괴롭히던 일진이었던 모양이었다. 지금에 와서 상황이 역전이 된 상황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렸었다.
“ 너 나 아니면 밥 먹고 살겠냐? 예전이랑 완전히 우리 관계가 달라졌다? 그렇지?”
라고 말하시는데 내가 다 숨고 싶었다.
그날도 여자 세 명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었는데 여자애들이 배고프다고 하자 중국요리를 시켜 주셨다. 여자들 만지고 놀고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은 없어 보였다. 그저 젊은 작가들을 자기편으로 포섭을 하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 그것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 주민 씨. 형준 씨. 이번에 싱가포르 아트페어에 우리 갤러리 나갑니다.”
싱가포르 아트페어라면 아시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시장이었다.
“ 그래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화랑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와는 다르게 형준 씨는 작년에도 이 행사를 같이 다녀온 눈치였다. 둘은 이제 다시 보니 사뭇 친해 보였다.
“ 형준 씨는 작년에 나하고 둘이 나가 본 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을 테고 주민 씨는 이번에 같이 나가 볼래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아니 정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들 들어보니 부스는 화랑에서 제공할 수 있지만 모든 참가비용을 작가가 부담해야 했다. 항공비와 체류비 정도만 요구를 했지만 계산을 해보니 300만 원이 훌쩍 넘는 비용이었다.
“ 저는 작품이 아직 준비가 안 돼서 내년에나 도전할게요.”
“ 그냥. 주민 씨. 술 시리즈 말고 다른 걸로 준비해서 나가요. 같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나를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백 실장님 이셨지만 내 수중의 돈이라고는 200만 원 남짓이 전부였고 이 돈은 앞으로 내가 새로운 일을 구할 때까지 써야 하는 주현이와 나의 생활비였다.
“ 우리 같이 가서 저녁때는 재밌게 놀고 낮에는 그림 팔고 그러자고요.”
형준 씨도 거들었다.
“ 진짜로 작품이 없어서 그래요.”
사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다른 일은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시간과 작품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작품수도 많지 않았다. 그나마 경륜장 일을 그만두어서 앞으로 그림을 그릴 시간이 조금 확보되어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에게 온 처음 해외 아트페어의 기회를 떠나보냈다.
일을 그만두고 화실에서 모든 시간을 쏟아 그림을 그리는 일을 달콤했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활이 될 수가 없었다. 잠깐 쉬는 동안 승무와 함께 인도 여행을 가려고 많이 알아보고 있었는데 결국 여행도 가지 못했다. 역시 돈이 문제였다. 이제 나에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