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신사동 작업실.
48화. 신사동 작업실.
화실에 예전에 다녔다고 하는 나보다는 어려 보이는 남자 녀석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화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젠가 석고 소묘를 하고 있던 녀석 그림을 한 번 봐줬던 기억이 났다. 이런 화실에 와서 왜 석고 소묘를 하려고 하냐고 물어봤었는데 너무 석고 소묘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군대를 제대하고 만화 수습생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었는데 그 만화를 배운 것 말고는 미술 교육의 경험이 없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여기 화실까지 오게 된 것이었는데 나이를 따져보니 나보다 한 살 동생이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영길이다. 최영길.
녀석은 백화점에서 물류를 알바로하고 있다고 했다. 일을 병행하며 연재만화를 준비 중이었는데 4년여의 수습생의 시간 동안 만화 배경을 그렸다는 녀석이 준비하며 만화를 그리는 실력은 누가 봐도 기성 만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피스 만화를 너무 좋아해 만화가의 꿈을 꾸게 됐다는 녀석은 원래 토목과를 다니던 학생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모범생이었던 녀석은 군대에서 만화를 접하고 만화가 너무 좋아져 만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녀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녀석이 한다는 백화점 물류는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이 난다고 했다. 그래서 그림도 그릴 수 있는 시간 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도 걸맞은 알바였다. 영길이 녀석은 우리가 화실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화실에 등록을 하게 됐고 나는 영길이를 통해 물류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영길이는 나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선생님이 하시는 동양화보다 유화나 아크릴 그리고 소묘 또한 나에게 배우고 싶어 했다. 물류도 일이 갑자기 바빠지는 시기여서 안 그래도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고 했는데 조만간에 성수기에 접어들게 되면 일손이 달려 사람이 필요 하니 잠깐만 기다려 보라는 것이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큰 사건이 두 가지 터졌다. 그중 하나는 주현이 오빠가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우리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강남에 우리의 작업실이 생긴 것이었다. 전에 내 그림을 사가신 분이 연락이 왔었는데 작업실이 필요하지 않냐며 말을 이어가셨는데 본인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의 창고가 필요해서 넓은 공간을 얻어서 쓰고 있는데 그냥 공간을 놀리기에는 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공간을 작업실로 쓰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보증 금하고 월세는 본인이 부담하는 대신에 우리 더러는 관리비만 내고 쓰라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넓은 작업실이 생겨서 기분은 좋았는데 강남 한 복판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나는 그때 역시 찬 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에 많은 사건은 일어났고 오롯이 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여기 물류가 일하는 방식은 여럿이서 팀을 짜서 하는 방식이었다. 각자 돈이 들어오는 회사는 따로 있지만 층을 나눠서 물건을 납품하는 방식으로 영길이와 필진이 형 그리고 내가 들어오면서 다시 층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주로 2층과 5층, 6층의 납품을 주로 하고 필진이 형은 주로 차에서 박스를 내리면서 층을 구분해 구르마에 실어 승강기 앞에 옮기는 일을 했고 영길이는 3층과 4층에 납품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모든 층이 납품이 끝나고 나면 1층의 납품을 필진이 형이 주로 했다. 분업화된 일은 효율성이 뛰어났다.
하루아침에 서울역에서 역삼동으로 출발하는 위치가 바뀌었는데 역삼동에서 안양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렸다. 그렇다 보니 나는 새벽 4시 반에 집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을 마치면 다시 강남으로 와야 했다. 작업실은 강남 신사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1층 같은 지하 1층이었는데 우리가 쓰기 전에도 누군가의 작업실이었다고 했다. 건물에서 들어갈 때는 지하 1층이지만 안에 쪽문이 하나 있는데 이 쪽문을 열면 지상이었다. 옆 건물 주차장과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작품을 하다가 커피 한 잔을 타서 쪽문 쪽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기 좋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인터넷으로 작가 공모와 공모전 그리고 개인전 공모를 매일매일 체크를 하고 공모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현이는 유리 용기에 김치가 담겨 있는 사진을 찍어 그림으로 그리는 작업을 했는데 공모전에서도 작가 공모에서도 슬슬 반응이 오고 있었다. 우리는 공모를 해도 같이 하고 공모전에 내는 것도 같이 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공모전에서 입상을 하는 일은 이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작가 공모 같은 경우도 제법 많이 되어서 매주, 매달 전시 일정이 잡혀나가고 있었다.
이 무렵, 골든아이 아트페어라고 큰 공모가 있었는데 당당하게 우린 둘 다 공모에 선정이 되었다. 이 공모에 선정된 작가에게는 전시를 무료로 해주었는데 그것도 무려 부스 개인전이었다. 코엑스에서 하는 전시였는데 선정이 된 것만으로도 꿈만 같았다. 그리고 내 작품은 경매까지 올라 기대를 더했다.
일전에는 소사벌 미술대전이라는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었다. 상금이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분은 최고였다. 선생님 화실에 다닐 때 말로만 듣던 공모전이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큰 상이 었다. 그리고 바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했는데 이번에도 선생님과 나란히 입선을 했다. 그리고 일본 신주쿠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개인전 공모에 선정이 되어 일본 개인전 준비로도 한창이었다. 미국에 있는 훈 갤러리라는 곳에 공모에도 둘 다 선정이 되어 미국 전시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작품을 한 점씩 해서 보내는 전시였는데 미국까지 그림이 가는 데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눈뜨면 일 갔다가 눈뜨면 그림을 그리는 일상이 계속 반복되는 속에 많이 우리는 지쳐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