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물류.
49. 물류.
한 달 남짓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나는 물류에 합류할 수 있었다. 추석 대목이 목전이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류 일은 겨울이 될수록 성수기에 접어든다. 옷들이 두꺼워지면서 박스에 몇 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박스의 양은 많아져 옷 수와 상관없이 박스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일이 많아지고 일손은 달리게 마련이다. 갑자기 일하던 웰로 지스틱스에서 일하던 동승 알바가 그만두는 일이 생겨 더욱 힘이 들었다. 그러던 중 지난 KYA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영규가 생각이 났다. 내가 지금 하는 물류는 그림을 그리면서 할 수 있는 좋은 알바라고 이야기를 해줬더니 자리가 있으면 본인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던 기억이 난 것이다. 졸업을 한 영규는 MBC에서 세트를 만드는 일을 잠깐 했었고 지금까지는 동대문에서 원단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그림에 미련이 많았는지 내가 하는 물류로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렇게 영규는 동승 알바로 안양 물류에 들어오게 됐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보루네오 특판팀에서 일을 하던 은식이가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일전에 연락이 왔었을 때 취직이 되었다고 좋아했던 녀석이었다. 강남에 작업실을 차렸다고 하니 와서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 주민이 형 정말 오랜만이네요.”
“ 그래 얼마만이냐? 잘 지냈지?”
“ 오랜만에 만났으니 낮 술이라도 해야겠는데.”
4학년을 잘 보내고 싶다고 경륜장을 떠나고 나서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 직장 생활은 어때?”
“ 그냥저냥 그래요.”
“ 그냥 가구회사 들어가서 가구 디자인하는 거 아니야?”
“ 특판 팀이라고 아파트에 붙박이 가구 같은 거 싱크대 들어가는 거 관리하는 부서예요.”
혀를 차는 녀석은 벌써부터 회사 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 많이 답답해요. 머리라도 식히러 어디라도 갔다 오고 싶은데 형 휴가 계획 있어요?”
“ 휴가 가야지. 오래는 못 가고 2박 3일은 갈 수 있겠는데.”
“ 같이 갈 수 있으면 같이 가요. 형. 주현이 누나도 같이.”
“ 그래. 계획을 한 번 잡아보자.”
작업실 옆이 바로 편의점이라 막걸리를 사러가는 길을 멀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남. 오늘은 아마도 술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지쳐 보이는 녀석과 술을 사러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경륜장에서 일을 할 때부터 나누어 마시던 막걸리는 은식이와 나에게 참 친숙한 술이다. 언젠가부터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막걸리 한 병이 빠지지 않고 있다. 인생의 해가 거듭될수록 느는 것은 술이요. 그대들과의 추억밖에 없었다.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도 안 되고 몇 해에 한 번 볼까 말까 하지만 그래도 어제 만난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다. 자기가 돈을 더 잘 번다고 자기가 사게 해 달라고 한다. 그래 술을 네가 사라.
“ 은식아. 오랜만에 놀러 왔으니까 형이 보드람 치킨 시켜줄게. 여기 보드람 맛있어. 그리고 사장님이 배달도 해준다.”
진짜로 안양에서 먹던 보드람 보다 닭도 크고 맛도 좋았다.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사장님이 특별히 배달을 해주셨다.
어느덧 이야기는 길어지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 이야기. 부서의 성격과 해야 하는 일. 모든 이야기를 들은 결과 은식이가 입고 있어야 할 옷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회사 생활을 힘들어하는 녀석에게 나는 물류를 권했다. 이 녀석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고 또 작가의 길을 도전해 보고 싶어 했다. 창작에 갈증을 참으며 6개월을 버텨내고 있었다. 나도 지금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은 없었지만 녀석은 내가 걸어가는 예술가로 성장하는 길을 같이 가고 싶어 했다. 나를 이정표 삼아 따라오는 것 같아 조금은 부담도 됐지만 인생에 뭐 정답 같은 것이 있는가?
몇 병의 막걸리를 더 비우며 녀석의 한탄을 들어야 했다. 은식이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인 녀석이어서 평소에 같이 일을 해보면 불만이나 불평을 하는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짧게 맛 본 직장 생활에서 적잖게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직장 상사부터 부서 업무 그 어떤 것 하나 녀석에게 맞는 옷으로 보이지 않았다.
“ 그냥. 때려치워. 너도 물류 해야겠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은식이는 지금의 모습과 같을 수 없어 보였다. 아직 젊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였다.
“ 그래도 될까요?”
“ 은식아 인생은 한 번이야. 한 번뿐인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잘할 수 있을까요?”
“ 물류에서 자리 나오면 바로 알려 줄 테니까 한 번 도전해 봐 봐.”
나에게 작은 위안을 받은 은식이는 휴가를 꼭 같이 가자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형님이 강남에 얻은 아파트 월세는 엄청나게 비쌌다. 경제 규모에 비해 큰 집을 얻었는데 형님이 다니는 직장과 거리가 가까웠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고 가더니 아예 살림을 차리고 사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잠깐만 쓰자는 사람들이 완전히 눌러앉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형님이 조금 힘이 드셨는지 우리에게도 월세를 조금 보태어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주셨다. 나도 나름 보태 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나 역시 힘이 들었다. 작업실 관리비가 60만 원에서 많게는 80만 원 사이 나오던 참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가면서 집을 쓰는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월세를 받으시라고 당부를 드리면서 우리는 짐을 다시 작업실로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작업실 생활을 하게 됐다. 그나마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렇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현이 동생이 지척에 살고 있어서 필요하면 그 집에서 잠을 청할 수도 빨래를 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어려웠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이 생활도 그렇게 불편할 것도 없었다.
새벽에 일찍 일을 나가야 하다 보니 출근을 하 기 전까지의 새벽 시간을 쪼개서 잘 써야 한다. 그래서 매일매일 반복하는 습관들이 생겼다. 일단, 잠에서 깨어나면 양치와 세수를 한다. 그리고 라면을 끓이는 준비를 하는데 찬물에 그냥 면과 수프를 넣고 끓인다. 끓이는 동안 모닝 똥을 싼다. 라면 냄새가 날 무렵이 되면 거사 역시 끝이 난다. 화장실을 나와 보면 라면은 먹기 좋게 익어있다. 빠른 속도로 라면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길을 나선다. 백화점까지 가려면 사당역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한다. 그때까지 잠깐 버스에서 존다. 이때 자는 잠 역시 꿀잠이다.
전날 과음을 해서 조금이라도 늦잠을 잤다면 식사를 못하고 출근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안양역 앞에서 파는 토스트를 하나 사 먹는다. 느끼한 맛이 해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뜨겁기 때문에 약간의 해장 기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