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안산으로.
62화. 안산으로.
단원에 전시를 할 무렵, 우리는 다시 한번 이사를 결심했다. 다시 한번 여기서 겨울을 맞았다가는 둘 다 입이 돌아가는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지난 모임에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미술교육대학원에 다니던 친구였는데 선을 본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수더분하니 그 작가에게 잘하는 모양이었다. 교육대학원을 졸업을 하면 임용시험을 봐야 하는 일을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면서 취직이 아닌 취집을 하게 된 것이었다. 작가를 꿈꾸던 친구는 교사에서 이제 한 가정의 아내 그리고 엄마로 인생의 좌표를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작가 한 명의 결혼은 작가 모임 자체를 흔들만한 일이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마지막 엠티를 끝으로 더 이상 모이지 않았다. 갑자기 승무가 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 것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더 이상 작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회원들이 늘어나면서 모임의 성격과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청년 예술의 힘을 명맥을 이어보자고 갤러리를 차려서 직접 공모를 해보자는 둥. 야심 찬 결기가 있었지만 미술계의 침체와 경제의 불확실성이 시장을 교란시키며 우리가 꿈꾸던 모든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단원 미술대전 우수상을 받은 나는 상금도 받았다. 총상금은 100만 원이었는데 상금에도 세금이 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전에 대상을 받았을 때는 상금이 적어서였는지 그냥 수표로 그 금액을 줬었는데 단원 미술대전은 안산시에서 공무원이 직접 집행해서 그런지 세금을 제하고 상금을 입금해 주었다.
공모전이 끝나고 일주일 후에 우리는 안산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안양에서 작업실을 얻어 보려 했지만 1년 사이에 안양의 집값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올라 있었다. 안양에서 집을 얻는 일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세 개의 부동산을 통해 30개의 집을 보고 나서야 우리는 집을 고를 수 있었다. 난방과 안양까지의 거리 그리고 환경까지 생각을 하다 보니 많은 집을 보게 됐다.
그나마도 자가용이 생겨서 안산행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일하는 백화점까지 15킬로 정도 떨어진 위치에 집을 계약하게 됐다. 주현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출을 받아 이번 이사는 집을 사서 하는 것이었다. 대출이자는 내가 내기로 했고 주현이 어머니가 계를 잘 이어 나가면서 몇 년 안에 대출금을 다 갚자는 취지였다. 3천만 원을 보태준 주현이 오빠 명의로 사자는 것이 조건이었다. 나는 더 이상 춥지 않은 곳에서 월세를 내지 않기만 해도 어디냐 라는 생각뿐이었다.
복잡한 시내에서 살다가 조용한 빌라 촌으로 오는 것도 참 좋았다. 주변에는 공원 조성이 잘되어있어서 우리가 좋아하는 산책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우리가 안산으로 이사를 한다고 하니 영길이도 들썩이더니 결국 우리를 따라서 이사를 왔다. 아니 우리보다 하루 먼저 이사를 했다. 날짜를 맞추다 보니 어떻게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처음 이사 온 동네에 이웃사촌이 하나 생겼다. 그렇게 안산 생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