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작업실.
70화. 작업실.
“ 근데 왜 갑자기 보자고 하셨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 다름이 아니라 유 박사. 한국미술 연합회라고 전에 재명이가 이끌던 단체 기억하지? 거기에 재명이가 죽은 다음에 회장을 하는 윤진 씨라고 있어.”
예전에 작가들이 모였을 때 나와 주현이더러 회원이 되라고 하셨던 분이셨다. 재명이라는 분은 한국미술협회에 버금가는 협회를 만들겠다고 열심히 노력하신 분인데 안타깝게도 작년에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 알죠. 기억하죠. 윤진 씨라는 분은 이번 가을에 전시 같이 하시는 분이잖아요.”
전에 안양에서 작가들 모임을 갖고 나서 차가 끊겨 집에 가기 애매했던 상황이었는데 윤진 씨라는 분이 차를 가지고 와서 가는 방향이 같다며 차를 태워다 주셔서 편하게 온 적이 있었다. 나와 같이 안산에 사시는 분이셨다.
“ 유 박사 기억하는구나. 그 윤진 씨가 유 작가 사는 동네에 작업실이 있는데 그걸 유 작가한테 팔고 싶어 하네. 어떻게 생각해?”
지나가는 말로 작업실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다. 흥미 있는 제안이었다. 우리도 올해 결혼을 하면 작업실과 집을 분리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집은 조금 집답고 작업실에서는 맘대로 작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벌이가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보증금에 월세까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 오. 주민이 이제 작업실도 생기는 거야?”
세종이도 신기한 듯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 근데 작업실이면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저 돈 없어요.”
4 개월을 꼬박 벌어놓은 돈으로 버티고 나니 앞으로의 생활비 말고는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 아니. 잘 들어 봐. 그 작업실을 동생이랑 경매로 싸게 샀던 모양이야. 그리고 누군가 한테 잠시 쓰라고 내어 줬는데 제 집처럼 쓰면서 나가지도 않고 아주 골치가 아픈가 봐. 그래서 주인이 바뀌면 나갈까 싶어서 판다고 하니 아마 가격도 조정이 가능할 거야.”
경매로 샀지만 지금은 본인이 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뺏긴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그분도 돌파구가 필요해 보였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미술 연합회 사무실로 쓰던 곳이라고 했다. 과거의 기억에 한번 선생님을 따라서 가본 적이 있었다. 짓다가 망해서 을씨년스러운 건물 3층에 위치해 있었다.
“ 그러면 나중에 한 번 뵙는 걸로 하죠. 주현이랑 같이.”
안 그래도 전시 때문에 안양 선생님 중심으로 작가들이 종종 모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윤진이 누나는 언제나 자리를 같이 했다.
“ 그리고 말이야 원호 알지? 이번에 전시 진행하고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인터넷으로 그림을 파는 업체를 아는 모양인데 우리들이랑 언제 같이 가보자고 하더라고. 거기 가서 상무라는 사람이랑 상담도 한 번 하고 그러 자네. 이름이 뭐라 했더라. 아 맞아. 포털아트라고 했어.”
포털아트라면 예전에 잠깐 역삼동에 살 때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볼 수 있었던 미술품 경매회사가 아닌가? 나는 언제 저런데 캐스팅이 되나 싶었는데 신기할 따름이었다. 생각보다 그림의 거래가 많다고 했고 그 윈호 선생님도 그곳에서 버는 수입으로 생활을 하신다고 했다.
“ 포털아트요? 잘 알죠. 인터넷 경매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회사잖아요.”
“ 역시 유 박사는 알고 있었구나. 거기 언제 영길이랑 주현이랑 같이 가보자고.”
무슨 영문으로 부르셨나 싶었는데 진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동안 일만 하느라고 그림은 뒷전이었는데 이제 다시 열심히 작업을 해야 할 구실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얼마 전에 굶어 죽었다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가 살던 곳이 안양이었다며. 그것도 석수동.”
내가 살았던 석수동에는 석수시장이 있었는데 상권이 죽어가는 석수시장을 젊은 예술가들이 들어와서 동네를 살리겠다고 아트마켓이며 다양한 시도를 한 곳이 있었다. 학교를 다니며 이론수업을 들었을 때 관련된 내용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스톤엔 워터'라는 대안공간이 있었는데 여기서 전시를 기획한 기획자는 몸집이 커져 미술계에서 제법 인정을 받는 인사로 성장하면서 석수동은 더 유명해졌다.
“ 그렇다고 하더라고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충무로에서는 기대주였다고 했다던데.”
선생님도 그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었다. 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염을 앓고 있던 작가는 김치와 밥을 나누어 달라는 메모를 집 앞에 남기고 허망하게 죽어 갔다. 21세기에 그것도 한국에서 내가 나고 자란 고향 같은 석수동에서 그것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런 쓸쓸한 죽음이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이야기가 우울해지면서 술자리는 파했다. 시간이 지나 그 작가의 죽음은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