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번트엄버 Sep 17. 2022

69화. 선생님 화실.

69화. 선생님 화실.

69화. 선생님 화실.



 세종이 녀석이 촬영 전부터 일찍 끝날 거라는 확신을 하던 촬영 날이 왔다. 나가는 일마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다 보니 솔직히 나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광고주도 제작진도 어차피 돈을 많이 쓰면서 촬영에 임하기 때문에 최대치로 장비와 인력을 활용해서 베스트 샷을 찍으려 하기 때문이다. 

 잇몸약 촬영이었는데 연기자는 국민 엄마로 불리는 분이었다. 이 분은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어서 본인이 오케이를 하면 더 이상 감독이 테이크를 할 수 없는 연기자이기 때문에 촬영이 일찍 끝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연출 감독도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 세팅을 하는 일에 많이 관여하지 않아 진행 속도가 무척 빨랐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몇 신을 더 찍더니 거짓말처럼 촬영은 진짜 끝이 났다. 이렇게 빨리 끝난 촬영은 처음이었다. 일찍 끝난 것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세종이와 술 약속을 했다. 나는 장비를 사려서 사무실에 들러야 했고 세종이는 다른 촬영 장소 헌팅 일정이 잡혀 있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안양에 나가면 얼추 시간이 맞을 거 같았다.


 광고를 비판하는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지금은 그 광고판에서 일을 하며 밥을 먹고살고 있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런 현장들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조명일을 시작한 이유였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직접 촬영 현장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조명도 잘 배워서 나가 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됐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사무실에 들러서 내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다시 약속 장소인 안양으로 나왔는데 아직 시간은 7시로 다소 일렀다. 세종이와 통화를 해보니 녀석도 헌팅을 마치고 집에 거의 도착을 했단다. 선생님과도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 화실로 향했다. 

 같은 건물의 지하로 이사를 하신 선생님 화실에 들어서는데 역시 지하여서 그런지 입구에 들어서자 곰팡이 냄새가 피어올랐다. 컴퓨터로 음악을 켜놓고 선생님은 한쪽에서 그림을 그리시는데 열중이셨다. 

 “ 오! 유 박사 얼마만이야? 어서 와. 어서 와.”

 중간중간 쉰 목소리가 올라오시는 음성으로 나를 맞아 주신다. 선생님은 말을 한참을 안 하다가 갑자기 말을 하시면 종종 쉰 목소리가 섞여서 나오신다.

 “ 오랜 만이네요. 요즘 저는 일한다고 정신이 없어요.”

 선생님께 세종이가 하고 있는 광고 조명 일을 시작했다고 말씀을 드렸다.

 주현이가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업체를 찾아내어 직접 문구와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청첩장이 마침 집에 도착을 해서 가지고 나온 참이었다. 선생님께 안양 화가들과 내가 아는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청첩장을 넉넉하게 챙겨 드렸다. 한 분 한 분 찾아뵙는 일이 맞지만 빡빡한 스케줄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 유 박사랑 주현이가 드디어 결혼을 하는구나.”

 우리가 다시 재회를 한 공간이 선생님 화실이었는데 이제 지하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이상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 아무래도 지하는 좀 그렇지 않아요? 선생님 작업들도 거의 종이에 그리신 건데 나중에 곰팡이가 피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진심 걱정됐었다. 지하실은 아무리 관리를 해도 곰팡이의 공격을 피해 갈 수 없다. 

 “ 이제 화실에 배우러 오는 사람도 한 사람밖에 없고 동생한테 지원받는 걸로 연명하려면 어쩔 수 없어.”

 그간 보증금도 다 까먹었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상념에 싸여 있을 무렵, 세종이가 도착했다. 

 “ 여어. 오 박사 진짜 오랜만이다. 어서 와.”

 선생님은 언제부터 우리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붙이신 걸까? 

 “ 언제 지하로 옮기셨어요? 지난번에는 왔다가 그냥 갔었어요. 선생님도 이제 핸드폰도 쓰시고 그러세요.”

 아직 선생님이 핸드폰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는 세종이었다. 선생님도 신변에도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선생님 아버지가 전립선암에 걸리신 것이었다. 노인이셔서 암의 진행이 빠르지 않아 병원에 입원을 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 눈치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술을 사 와야겠다. 언제나처럼 술은 화실에서 마실 것이다. 어차피 올 사람도 없다고 하니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술과 안주를 사 와야겠다. 

 안양 중앙시장은 언제 와도 반갑다. 평소에 화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식사를 잘 챙겨 드시지 못하신 탓일까? 선생님은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 보였다. 오늘 오랜만에 선생님과 배 터지게 한번 먹어야겠다. 되는대로 포장이 되는 것들을 다 사보자. 그렇게 우리는 선생님 화실을 나와 족발에 만두 그리고 전집에 들러서 전도 조금 샀다. 돌아오는 길에 할인 마트에 들러서 술도 넉넉하게 샀다. 그 사이 선생님은 그리시던 그림을 다 정리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 많이도 사 왔네. 일루 와.”

 그림을 그리시던 탁자를 어느 정도 정리를 해 논 상태였다. 선생님의 굽은 팔처럼 의자들도 다리가 약간 굽어 보였는데 앉아보니 역시나 기우뚱거렸다. 

 “ 요즘 바쁜가 봐? 도통 연락들도 없고 세종이는 돈도 잘 번다며?”

 선생님은 세종이가 감독으로 입봉 한 사실을 아시는 눈치였다. 

 “ 이제야 바빠진 건데요. 뭘. 지금까지 계속 한가하다가.”

 실제로 세종이는 입봉 하기 전까지 한 달에 5일 정도만 일을 했다. 세종이 역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는데 희한하게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고 나니 금방 입봉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 주민이는 8월 말에 결혼을 한다고? 축하한다.”

 결혼식 하기 전에 웨딩 촬영도 해야 하고 예물도 맞춰야 하고 신혼여행 계획도 세워야 하고 할 일이 많았지만 갑자기 잡히는 촬영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결혼까지 하는 일에는 화실도 역할을 참 많이 했는데 위치가 바뀌어서 좀 섭섭하네요.” 

 “ 선생님이 여기 있는데 뭐가 문제야. 왠지 주민이 결혼하기 전에 오늘 보는 게 마지막일 거 같구나. 한 잔 하세.”

 결혼식까지 석 달 정도 남았지만 아마도 선생님의 예측이 맞을 것이다. 하루하루 쌓여가는 스케줄은 앞으로의 나의 일과가 어떻게 될지 나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