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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엄버 Sep 17. 2022

71화. 내 그림들...

71화. 내 그림들...

71화. 내 그림들...


아직 5월이 다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5월 초에 일을 시작한 나는 열흘을 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오버 차지까지 생각하면 적당한 정도로 일을 한 것이다. 이제 5월에 남은 날들은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작업실은 주현이와 상의 끝에 사기로 결정을 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은 다 쓰고 없었다. 하지만 주현이 동생과 오빠가 신혼여행을 가라고 보태어준 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주현이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신혼여행을 가라고 보태준 돈이었지만 우리는 그 돈으로 작업실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신혼여행이야 나중에 여유가 더 생기면 가면 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집을 살 때 도움을 받았던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써주었다. 주현이가 윤진이 누나와의 협상에서 가격을 많이 낮춰 합의점을 찾았다. 이 누나도 얼마나 이것을 팔고 싶었으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줬을까 싶었다. 

 10 년 전에 900만 원 정도에 경매에서 낙찰을 받은 것을 우리에게 650만 원에 팔기로 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쏟아부어야 만들 수 있는 돈이었다. 우리가 열심히 하는 젊은 작가니까 거저 준다는 생각으로 파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진심으로 고마웠다.

 기분 좋게 계약서를 쓰고 법무사에게 넘겼는데 상상도 하지 못한 세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산 가격으로 산정된 세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공시지가가 높으면 세율이 공시지가에 맞게 산정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런 홍두깨는 없었다. 수임료와 세금을 합쳐 300 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피눈물을 흘리며 내야 했다. 수중에 있던 모든 돈을 쏟아부었기에 세금을 낼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현금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주현이가 오랜 시간 부어온 주택 청약이 있었다. 그 청약을 깬다면 그 돈으로 세금을 낼 수가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청약을 깨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작업실은 생겼지만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이제 맘 놓고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 작업실이 있는 건물은 건설사가 짖다가 망하는 바람에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건물 내부나 외부가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쓰기에는 너무 좋았다. 외관이 그래서 그렇지 입주해 있는 회사나 사무실도 많았다.

 일이 없는 날이면 나도 작업실에 나와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포털아트에 새로운 그림도 가져가야 되고 해서 한 동안 통 연락이 없었던 청담동 갤러리에 전화를 했다. 전에 통화를 자주 하던 큐레이터는 이직을 했고 대표와 전화를 하려고 여려 차례 시도를 해도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없는 시간을 내서 청담동 갤러리 자리에 가보니 짐을 다 빼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내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피 같은 그림들. 전시 때문에 키핑을 하자고 해서 무심결에 계속해서 동의해줬는데 이제 나는 어디 가서 내 그림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막내 큐레이터와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그녀는 이직을 한 상태여서 전 직장의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더 적극적으로 뭘 알아보려 해도 잡히는 스케줄은 나를 주저앉혔다.

 ‘부동산으로 중국에 투자를 한다고 하더니 뭐가 잘 안 됐나?’

 그저 그렇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기다려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차피 포털아트에서 팔 수 있는 그림들은 소품 같이 작은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사이트에 들어가서 판매 동향을 보니 대체로 작은 사이즈의 소품들이 잘 팔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그림을 그려 커리어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에 설핏 줄이 터지도록 그림을 그려야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까지도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여 왔다. 하지만 미국 발 경제 위기에 연일 터지는 미술계의 악재 앞에 종이 장 같이 가벼운 무게로 무너져 내렸다. 의지도 의식도 모든 것은 흐려지고 있었다. 솔직히 이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절망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실망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꼬여버린 상황이라도 이룰 수 없는 꿈 일지라도 꿈을 꿀 수 있었고 그 꿈으로 향해 주현이와 같이 걸어가는 길은 나에게 있어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 성공과 실패는 그다음의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작은 실수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소품 작업을 해야 했다. 

 조명일은 스케줄이 있는 날이면 그 전날부터 시간의 구애를 받기 시작한다. 집합 시간이 이른 새벽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일찍 잠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야행성 인간이었기 때문에 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체로 새벽 4시 반 정도 집합인 경우가 많았는데 9시 정도쯤에는 늦어도 10시 정도 에는 잠에 들어야 했다. 적당히 나를 재워줄 정도라면 막걸리 두 병이면 족했다. 술도 술이지만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도 중요하다. 예전부터 나는 속이 비어있으면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여차하면 밤을 새우는 직업의 특성상 수면 관리를 잘못하면 일을 나와서 좀비 같은 몸으로 일을 할 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기민하게 수면을 관리해야 한다. 아직까지 관리하는 방법이 술밖에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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