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이 없어서 딴짓을 합니다.

by 정미리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내뱉을 대나무숲이 없어 사람들은 대나무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고 한다.


여동생은 5학년 짜리 아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서 하루 종일 후회 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가장 날카로운 말을 들으면 엄마는 가장 먼 사람이 되고 만다. 마음을 못 본 무심한 말 한마디로 엄마도 아들도 괴롭다. 말 없는 남편과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는 동생은 날마다 대나무 숲이 필요하다고 내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낼 대나무 숲이 없어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버린 오래된 말을 토해낼 방도가 없어 춤을 추는것은 아닐까?

표현할 길 없이 흩어지는 말들이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닐까?

꿀꺽 삼켜야만 했던 그 말, 두고두고 곱씹어지는 그 말이 그림이 되고 글이 되고 춤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다.



완치와 재발을 반복하며 11년째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늙으신 부모님에게 재발 소식을 전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 앞에 설 때마다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조심스럽게 나의 안부를 묻는 전화들. 안쓰럽게 바라보는 지인들. 그들 앞에서 그저 웃을 뿐이다. 온 힘을 다해.


내 속에 깊이 가라앉은 말들을 끌어올리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간신히 끌어올린 말들을 눈물은 다시 목구멍 안에 가둬버렸다. 그러다 말을 잃어 버렸다. 남에 대한 말은 할 수 있지만 나에 대한 말은 할 수가 없다. 한 마디도.


나에게 대나무 숲이 있다면 나는 말할 수 있을까?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대나무숲에서, 쉬익 쉬익 나무들이 부딪치는 소리에 숨어 작은 나는 꺼이꺼이 울 것만 같다. 꾹꾹 눌러놓았던 모든 눈물이 다 쏟아지도록. 그렇게 시원하게 다 울고 나면 그때는 대나무 숲에서 나의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대나무 숲이 없어 나는 날마다 딴짓을 한다. 그런 대나무 숲이 없어 나는 오늘도 글을 쓰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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