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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다 Jan 08. 2022

% 세일의 덫

덫에 걸린 한 마리의 짐승이올시다

남편이 모 브랜드의 신상 시계를 보고 싶다고 해 퇴근 후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 토요일 오후. 먼저 도착해서 남편을 기다리며 슬렁슬렁 백화점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찰나 순간 옷 매장에 걸린 퀼팅 롱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글자가 먼저 들어왔다.


[ // % 세  일  ]


원래 가격인 다섯자리 숫자 위로 긴 줄이 하나 그어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이 정도면 원가에 비해 거저다 싶은, 네자리 숫자의 아주 저렴세일가가 적혀 있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옷을 만져보고 있자니 마침 남편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빠, 이것 봐. 엄청 세일한다. 그치?"


티가 많이 났을까? 평소엔 찰떡같이 말해도 개떡같이 못 알아듣던 우리 남편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대번에 알아듣고는 마음에 들면 사라면서 직접 사이즈까지 찾아주는 거다.  앗! 원래 한 사람이 발동 걸리면 남은 사람이라도 브레이크를 밟법인지 남편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내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번 겨울엔 남편도 나도 옷을 너무 많이 샀다. 이번이 진짜 진짜 마지막이라며 겨울 바지를 산 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머릿속에서 빨간 경고등이 울려댔다. 게다가 세일 가격에 속으면 안 된다고, 정가가 그만큼 거품인 거라고 우리 둘 다 백화점 세일 때마다 혀를 차지 않았던가.


"아니야. 얼마 전에도 이런 걸로 숏점퍼 샀잖아. 이제 그만 사야지.안 사. 안 살 거야."

"사도 돼. 얇고 가벼워서 오늘 같은 날 입기 딱 좋겠는데? 여보 어깨도 안 아프겠다."

"그러게. 이건 어깨 안 아프겠네. 그런데 이 색은 내가 원하는 사이즈가 없어."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애써 찾으며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데 옆에서 옷을 보시던 한 아주머니가 한 마디를 거드셨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사교성은 정말 대단하다.


"어머~그 옷 너무 잘어울리겠다. 날씬해서 작은 사이즈 입어야겠는데 뭘. 그거 입어봐요."


이성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그럼 나 입어만 볼게 오빠. 사진 않을 거야 진짜."




이 얼마나 부질없는 다짐이었는지. 옷방에 걸린 새 옷의 존재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내가 이렇게 사치스럽고 절제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십만 원도 안 하는 옷을 사놓고 사치를 말하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원이든 백만 원이든, 필요로 하지도 않은 것을 사느라 돈을 함부로 쓴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분명 사치다. 옷장에는 올 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겨울 외투들이 이미 즐비하다.


내 안에서 양심이란 판사가 결국 판결을 내린다.


"그러므로 너 유죄! 백화점 출입 금지. 온라인 쇼핑몰 눈팅 금지 삼개월 형을 선고한다! 땅땅땅"


그놈의 세일만 아니었어도 이런 충동구매를 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백화점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 % 세일' 이라는 글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다음에는 기필코 덫에 걸리지 않으리라. 풋, 한 번 비웃어주고 토끼처럼 폴짝 뛰어넘어 유유히 내 갈 길을 가리라.


정작 오늘 백화점 방문을 주도했던 남편은 시계를 사지 않았다. 또 나만 당했지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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