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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다 Aug 20. 2021

보살도 화나게 하는 남편이란 존재

창 밖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오랜 친구 최땡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지 같은 남편 놈


거두절미 다짜고짜 남편 욕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여기서 내 친구 최땡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야겠다. 최땡은 어릴 때부터 나이답지 않게 굉장히 생각이 깊고 온화한 성격이었다. 

화도 잘 내지 않거니와 말로는 화가 난다면서도 차분한 어투와 평온한 얼굴로  '어쩌겠니. 다 이렇게 사는 거지' 하며 달관자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나 혼자 분에 못 이겨서 미쳐 발광하다 머쓱해질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장난 삼아 이 친구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로 '보살님'



그런데 이 보살 같은 친구가 자기 남편을 거지도 아니고 세상에나, 그지 같다 욕을 하다니 놀랄 노자다. 어디 한 번 기억을 되돌려 보자. 이전에도 친구가 험한 단어를 입에 올린 적이 있던가?

...............


없다 없어.

그간 보아 온 최땡 분노의 최대치는 기껏해야 '이해할 수 없어' 또는 '기가 막힌다' '너무하지 않아?'정도였는데.


아. 보살 같은 사람도 남편이란 존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암, 그렇지. 원래 그런 것이지.




다행히 최땡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분노를 삭이고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다. 저 먼 나라에서는 지금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속좁게 굴면 되겠느냐는, 역시 보살님 다운 말을 톡방에 남기고서.

이런 사람의 입에서 욕이 나오게 하다니 최땡의 남편도 생각할수록 그 재주가 놀랍다.




우리 남편은 워낙에 애처가인지라 저혈압인 아내의 건강을 생각해서인지 주기적으로  나의 혈압을 올려준다. 나의 화는 주로 남편이 나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것에서 유발되는데 최근엔 이런 일이 있었다.


입추가 지나자 확연히 선선해진  밤 기온을 만끽하며 산책하던 길이었다.


"이제 밤에는 안 덥고 시원하다. 너무 좋아. 그치?"

"응  덥네. 그런데 나는 시원한 게 아니라 좀 운데."

잠시 후.

" 하나도 안 더워. 입추 지났다고 어떻게 이러냐. 

기분 좋지?"

"아니 오빠 나는 시원한 게 아니라 추워. 빨리 집에 가자."

다시 몇 분이 지나고.

"진짜 시원하다. 시원하니까 여보도 좋지?"

이런 말장난 같은 대화가 이십 분 동안 정확히 네 번 오갔고 네 번째에는 버럭하고 말았다.

"오빠 내가 춥다고 몇 번을 말해! 나는 시원해서 좋은 게 아니라 춥다고. 내 말을 듣긴 하는 거야?"

"참나. 너는 애가 왜 그렇게 화가 많아?"

"......"



이  일 말고도 내 말의 대부분은 한 귀로 듣고 흘리는 남편이 하루는 집에 와서 이런 자랑을 했다.

"여보, 회사 여직원들이 그러는데 나처럼 얘기를 너무 잘 들어주는 세심한 남자는 처음 봤대."






물론 남편들만 아내를 화나게 하는 건 아니지. 남편은 어떤 상황에서 나에게 화가 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너가 이유 없이 화낼 때."


관두자.


억울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나는 싱그런 초록빛이 매력적인 헐크로 진화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내 친구 최땡도 지금처럼만 남편의 외조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보살의 옷을 찢어발기고 나와 함께 녹색 괴물이 되어 날뛰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온다해도 남편들아 니들 탓이니 원망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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