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판다 Sep 09. 2021

순서와 거리와 효도의 상관관계

며칠 후면 추석이다. 코로나 때문에 매일이 불안하고 답답하지만 명절만큼은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다. 결혼한 이후로 명절이 진정 연휴였던가, 상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하는 노동절이었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었다. 시부모님은 정말 좋은 분들이셨지만 옛날 분들이니까 며느리로서 분명 감내할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믿는 구석도 있었는데 나보다 먼저 시집 온 형님,  내 동지가 되어 줄 이 집안의 맏며느리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었다.


바보같이.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여자들의 결혼 소식에는 빠지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결혼 상대가 장남인가?


요즘 세상은 장남, 차남, 아들, 딸 구분 없이 다 똑같다지만 그래도 여자들에게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 솔선해서 시댁의 대소사를 챙기고 시부모님의 안부를 책임지면서 아랫사람에게는 넉넉히 베풀어야 할 것만 같은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진달까.

그래서 나 역시 결혼할 남자가 차남이라는 이유로 많은 축하를 받았고 먼저 결혼한 선배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너는 막내며느리니까 그냥 가만히 있다가 시키는 일이나 잘하렴. 그럼 본전은 한단다."



그런데 나도 그들도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며느리 도리를 하는 데 있어서 첫째니 둘째니 하는 순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거리였다.




5Km

시부모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이다.  우리는 차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산다.

가깝다는 건 그만큼 볼 일이 많다는 뜻임을, 멀리 사는 맏이네는 전화 한 통으로 끝낼 일을 나는 매번 찾아가서 얼굴을 비춰야 한다는 뜻임을 그때 몰랐다.

덕분에 시가의 각종 경조사는 물론이고 시부모님의 입원이나 이사처럼 큰일이 있을 때마다 일을 고 시부모님 곁을 지키는 건 언제나 가까이 사는 내 몫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억울하던지. 제일 화가 났던 건 매년 두 번씩 치러야 하는 명절과 제사였는데 이때에도 시가에 꼬박꼬박 참석해 일을 하는 건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시어머니는 본인이 시집살이를 톡톡히 했노라 하셨다. 꼬장꼬장한 시어머니와 한 성질 하는 시누이들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줄줄이 달린 집에 시집 가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고. 그래서 내 며느리들에게는 절대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다는데. 맞다. 우리 시어머니 지금껏 이래라저래라 강요하거나 싫은 소리 한 번을 하신 적이 없다.


문제는 어머니의 넓은 아량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지라 오지 않는 첫째네에게 늘 "그래 쉬어라. 안 와도 괜찮다" 하신다는 것. 기름 냄새에 절여져  동동거리다가 형님과 통화하며 저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말을 들으면 어찌나 화가 나던지. 들고 있던 뒤집개를 남편 얼굴에 던져 버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절이면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차례를 치른 후, 아버님 상을 봐드렸다 치우고 다시 새 상을 차려서 네 식구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점심 먹을 때를 맞춰 들이 오면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온 얼굴로 상을 차려 대접했다.  멀리 사는 그들은 차가 막힌다는 이유로 나보다 늦게 와서 먼저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갈 때 손에 들려줄 음식들을 소분해서 담아두었다가  배웅할 때 챙겨주는 것도 잊으면 안 됐다.

그때마다 이게 막내며느리가 하는 일이 맞는 건가, 뒤바뀐 게 아닌가? 내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하고 궁시렁거리면서.



사실 나에게 며느리 노릇을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을 시키지도 않았고 내가 모르쇠 한다고 해서 불만을 표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면서 나 몰라라 하기도 어려운 거다. 그러기에는 내 얼굴이 너무 얇았다.




여전히 형네는 멀고 우리는 가깝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남편에게 제주도로 이사를 가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예 바다를 건너가버리면 맏며느리인 듯 맏며느리 아닌 맏며느리 같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소용없었을 것 같다. 몸은 편해지겠지만 마음은 더 불편해 견딜 수 없었겠지. 이런 걸 두고 지 팔자 지가 꼰다고 하는 걸까.



얼마 전 시가 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다. 퇴근 후 이틀을 장례식장에 가 앉아있자니 몇 년 전 시조부가 돌아가셨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오지 않았던 형님 덕에 졸지에 시조부의 유일한 손자며느리가 되어 사흘 내리 손님맞이를 했었다. 그날 밤 내렸던 게 비였는지 눈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쨌든 잠시 찬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하늘에서 내리는 뭔가에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이러다 내가 죽지. 화병이 나서 죽고 말겠지!!

그런데 이번엔 사뭇 다른 마음이 드는 것이 예전 같으면 형님은 안 왔는데 나만 쉬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냐며 화가 냈을 텐데 이상하게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시부모님이 마음이 많이 안 좋으시겠구나. 어쩌나 걱정만 하다가 그런 내 모습에 그만 내가 놀라버렸다.

나 이런 사람 아니잖아 왜 이래 갑자기?


이만큼 살아보니 시부모님과 가까운 것이 비단 물리적인 거리만은 아니었었음을 깨닫는다. 20분이 아니라  바로 옆집에 산들 내 마음이 멀었다면 지금까지처럼 할 수는 없었을 거다. 


나와 시부모님이 서로에게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이 똑같지 않을 테고 내가 시부모에게 느끼는 거리감만 해도  때에 따라 길어졌다 짧아졌다 유동적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나만 독박 효도를 하는 것 같다는 억울함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것이 풀꽃만은 아닌가 보다. 가까이 살며 자세히, 오래 본 시부모도 참 예쁘다. 이래서 정이 무섭다.




써놓고 보니 우리 형님이 나쁜 사람인 것 같아 보이는데 절대 아니니 이 글을 읽은 분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명절이 다가오니 괜히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저 태어난 순서에 따라 효도의 무게가 다르지 않고 가깝게 사는 자식이 먼저 움직이게 되더라는 이야기가.

가까이 살다 보니 더 많이 가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이 가까워지더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막내며느리니까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했던 얄팍한 마음이 뒤통수를  맞은 것도 인과응보쯤 되지 않겠냐는 반성의 의미도 있다.


그리고 며느님들  올 추석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얘들아 선생님도 학원에 오기 싫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