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이게게 어느 날, ‘내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다.
생각하는 듯한 그의 표정이 보인다. 그러더니 서서히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어린아이에게서나 보일듯한 엄청난 슬픔이 그의 몸 전체에 스며들고 있고 그 표정의 미세한 흐름이 영화 필름의 슬로 모션처럼 내 눈동자에 한 장면씩 선명하게 박혀 들어온다. 그런 표정을 머금은 채 그는 한참 뒤에 무슨 대답인가를 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그의 얼굴에 그려진 그 표정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감정의 순도를 매길 수 있다면 그때 나는 그에게서 순도 100%의 슬픔의 감정을 보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웅이의 모습에 충격과 놀람을 느끼며 동시에 그 표정을 보는 나 역시 슬퍼질 정도로 그의 눈을 통해 슬픔과 고통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가 소중하게 간직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가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존재라서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내가 사랑하고 인생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선택한 사람이 쌍방향적인 마음으로 나의 존재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안도와 행복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슬픔을 보면서 동시에 기쁜 감정이 드는 유일한 순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의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신 볼 수 없겠지만 정말로 내가 먼저 죽게 되는 순간이 오면 그날 그의 표정에 드리워진 감정이 폭발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에게 그런 슬픔을 절대 안겨주고 싶지 않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관계의 행복을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뭐든 것을 해볼 각오가 되어있다.
“나이가 들어 우리 둘 중 누군가 먼저 병이 들거나 자연사로 죽게 될 수 있잖아, 동시에 두 사람이 같이 죽게 되는 건 같이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울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꼭 사별이나 자연사가 아니라 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면 말이야. 웅이가 다른 누군가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나를 잃은 슬픔의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갈 테지만 그 시간들이 지나면 웅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웅이를 행복하게 해 줄 그리고 웅이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꼭 찾았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클 테니까. 결국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이기적인 내 마음이네? 그래도 결국은 극복해야 해. 나를 위해서 꼭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0.1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진지하고 구구절절한 나의 질문에 웅이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곧바로 맞받아친다.
"왜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해?"
웅이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가정과 상황들에 의미 부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에 관심조차 없다. (그렇지만 우주와 2천 년 전의 세상 등 현실성과 동떨어진 공상에는 눈이 아주 반짝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웅이의 모습이 나는 좋다.
그래서 우리 관계는 아주 심각할 정도로 예민해질 수도 과격해질 수도 없다. 단순함과 정교함, 부드러움과 대담함, 진지함과 단순함 등 그 다른 선 어딘가에 놓인 다른 행성의 사람이기 때문에 폭주할 수 없는 균형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