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에도 없는 이민을 두 번이나 하게 되다 보니 어린 나이에 첫 이민 갔을 당시의 서러움과 어려움들이 플래백으로 올라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적으로 훨씬 윤택한 데다가 언어 장벽 또한 없다시피 하니 이민자의 설움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한데 지난날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는지 계속 내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맴돈다.
같은 영어권이라고 해도 역시 타국은 타국이더라. 아무래도 유럽 밖에서 일을 했기에 여기서는 내 이전 경력을 오롯이 다 쳐주지도 않아서 직급을 낮춰가도 취직이 될까 말까 한 데다가 호주라는 곳이 워낙 페이를 후하게 쳐주던 아주 좋은 나라였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하던 일에 어떤 성취감도, 미련도 없어서 다 던지고 여기에 왔다. 그래도 이전 직업이 줬던 이 오묘한 안락함 같은 것에 십수 년간 중독된 탓인지, 아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이곳에 오고 나서 뭐에 홀린 듯 다시 취업하려고 아등바등 댔더랬지. 면접에서 광탈을 몇 번 하고 나니 내 형편에 맞지도 않는 직급에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게 되고 그 허탈함에 괜히 몇 주간을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10년 치 짬이 생겼기에 승진을 위해서 이직을 준비했겠지. 이렇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 상태가 아주 심난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또 예정되었던 대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자니 그것 또한 많이 두렵기만 하다. 이미 이십 대 때 병동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죽음의 수렁에서 공부를 해낸 거나 마찬가지이니 그때의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날 때마다 '내가 정말 이번 기회에도 온전히, 건강하게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고. 지금 서류를 넣어봤자 올해 말에 학기가 시작되니 붕 떠버리는 시간 또한 난감하고. 30 중반에 순수한 관심으로 시작하는 공부라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공부의 시작은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라는 게 결국 현실이 아닌가 싶다.
'놀아 본 사람이 놀 줄 안다.'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시기이다.
난 평생 동안 쉬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순탄하게 차곡차곡 쌓아 올려오던 내 삶이 이곳에 온 후 다 무너져 버리는 듯한 절망감에서 당최 헤어나 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