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Jan 24. 2022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개인적인 해석과 견해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의 가장 위험한 점은 세상에선 이를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넘어가버린다는 것이다.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돈을 잃고, 아내를 잃어도 훤히 다 티가 나는 판에."

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르케고르

세상에 내 육신만이 살아 있음을 각인시키고 알리려는 행위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기 가장 쉬운 행위이며, 죽음으로 가는 병, 고로 절망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유하며 나 자신을 지켜내려는 시도 속에서 느끼는 고통을 흔히들 절망이라 단정 짓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를 타(인)의식주의적인 삶에서 자의식적인 삶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성장과정으로 보았다. 요즘은 조롱의 의미로 전락한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는 문구가 이와 일맥상통하는 것 하는 거 같다.


그에게 있어 죽음으로 가는 병이자 죄이고 절망인 것은 위에 언급한 성장을 회피하고 삶의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하나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일컫는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지 모른다. 의무 교육을 마치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만들고 사는 삶 또한 내면에서 올라오는 자신에 응하는 것 아니냐고. 솔직히 말해 보자. 이 선택들을 보편적인 수순으로, 특정한 나잇대에 택했다면 남을 추월하고 싶거나 남들과 동기화 되고픈 욕구가 전혀 없다 자신할 수 있는가. 당연히 출산 같은 신체의 변화가 뒤따르는 선택은 할 수 있는 시기가 제한적이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시기가 다다른다고 해서 다른 면들이 하나도 충족이 되지 않는데도 선택을 감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험으로 빠뜨리는 일이 아닐까. 


내 행위가 항상 바깥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내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사명을 필사적으로 피하려는 시도이다. 개인의 개성 조차도 남의 이목을 집중하기 위해 (돋보이고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의 본질에는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신에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지라도 이 위험한 행위를 견디게 만든 힘이 타인들에게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 위함, 그리고 남들에게 철인으로 알려지기 위함이면 이는 진정 자신을 위한 것인가? 지구 한 바퀴를 건너온 값비싼 의식주를 소비하는 것 또한 그런 것을 쉽게 누리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위해 소비하는 거라면 80억 인구 중에 그런 사람들은 큰 운동장을 채우고도 남지 않을까?


나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내 욕구에 솔직해지지 않으면 준비되지 않은 때에 삶의 선택을 하거나 본인이 아예 감당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 삶의 방향성도 잃어가고 찰나의 만족감으로 허기를 채워가는 절망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자신(selfhood)에 대한 정의는 확실히 내리지 않는다. 사회적 입지를 다진 후에 자신을 찾아 나가라는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매슬로우의 욕구 이론 속 제일 윗 단계인 자아실현과 상당히 비슷한 단계의 성장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