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May 12. 2022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까지

나르시시스트의 자녀로 자라난다는 것은 생명이 도구화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형체화 시킬 수 없는 인간적 가치는 모두 다 지워지고 나르시시스트의 도구로 전락한다. 부모의 가치를 드높일 수 없다면 그 아이에겐 어떤 평화도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엄마가 내뱉은 말과 표정으로 처음 들이마신 혐오의 잔재는  뇌리 속에서 깊숙이 리를 틀어  사고의 모든 것을 제어하게 되었다. 자기혐오와 자책이  성정의 핵심이 되어 버리는 것이 cptsd 주된 증상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지속되는 행복과 만족감은 아예 없기에 모든 긍정적인 감정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 감정도 자신의 자식을 비웃음 거리로 만들어 느끼는 희열이었고. 그런 순간순간 이용당했던 것을 나이가 들어 되짚어 보니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싶어 망연자실하게 된다.


나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면 내 부모를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상담 초기에는 본능적으로 내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파헤쳐보고 싶었다. 살 비비고 같이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 특히나 부모 같은 경우엔 말이다.


거리를 두고 몇 년을 걸쳐 내가 파악한 엄마는 이랬다. 푼돈 좀 만져 보겠다고,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자기가 그렇게 깔보던 모국의 동네 사람들과 다시 섞여 지내야 한다는 창피함 때문에 엄마란 여자는 불법체류를 무려 15년 넘게 했다. 이 세월을 이렇게 보낸 데에는 허영과 자존심 말고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범법자 신분으로 살아도 외국에 나와 있는 나 자신이 한국에 다른 이 보다 훨씬 나아 보이니까. 엄마에겐 외국살이가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이민법이 어떤지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했고 어떠한 장애물도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말 한마디 못해도, 잡일을 하더라도, 도망을 다니는 신세여도 그 삶이 그녀의 허영을 채워주는 듯했다.


나 또한 그런 부모를 만난 죄로, 성인이 되어 비자를 받고 시민권까지 얻은 후에도 부모와 같이 도망자 신세였고 말이다. 부모가 하는 모든 삶의 선택들은 마치 최악의 옵션들만 일부러 고른 듯싶을 정도로 비이성적이었다. 나중에 장성한 나를 통해 국외에서 신청할 수밖에 없는 비자를 호주 내에서 받을 거라고 큰소리를 떵떵 치더니 두배의 돈을 들여 제출한 장관 탄원서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그래서 다시 도망자 신분으로 전락, 결국 이민경찰에 잡혀 수용소로 들어가 한국으로 추방당했다.


어려서부터 항상 느꼈지만 엄마는 항상 안 된다고 정확히 명시되어있는 것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자신은 물론 모든 이의 인생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불법 체류 와중에도 한주에 여러 의사를 보는 소위 의료 쇼핑을 해서 약 처방전을 여러 개 받아 남용을 하는 바람에 수술을 받았던 적도 있으니. 이 여자의 머릿속엔 자신이 원하는 목적만 보이고 현실에 장애물들은 전혀 보이지가 않는 거 같다. 이 여자 눈엔 세상이 그렇게 우스워 보이나 보다. 자기가 천하의 병 x인건 모르고 말이다.


이런 덜떨어진 인간의 노리개로, 도구로 살아왔다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혐오하고 힘들게 해왔던 이유가 이런 인간 폐기물과 언젠가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스무 살 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 앞이 까마득했었지만 그래도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명백하고, 찬란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되어 그런 것은 없었고 되리어 내 존재의 시작이 멍청한 나르시시스트의 뒤틀린 욕망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씁쓸하고 고통스럽다. 내 뿌리를 뒤흔드는 극도의 허망함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치료 상담을 받은 지 6년이 되어가지만 이 점에 대한 허탈감은 부모와 물리적 소통을 차단하고 3년 차에 들어서야 처음 느꼈다. 올해에 들어서 그것이 더욱 구체화됐으니 그 후로도 3년의 세월이 더 걸린 셈이다. 나르시시스트 학대 아래 자란 cptsd 환자가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긴 시간과 인생에 엄청난 변화가 필요하다.


물리적 차단:  


상담 치료를 시작하면서 느낀 거지만 나르시시스트 부모와 공존하며 자신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다. 아예 치료 자체가 전개가 안 된다. 따로 나와 살아도 어느 정도 연락을 하고 지낼 땐 상담을 하면서 어떠한 진전이 없었다.


부모를 볼 때마다 어릴 적 트라우마 플래시백이 올라와서 혼란에 빠지고 이성적인 현실 판단을 못하는데 어떻게 평온한 환경에서 내 내면을 다시 건설하겠는가?


같은 집에서 살면 집을 나와야 하고 같은 도시에 살면 이주를 해야 한다. 물리적인 위치가 노출되어 있으면 스토킹을 당하게 되어있다. 나 또한 5년간 잠수를 탔지만 같은 도시에 살았기에 엄마는 내가 출국하기 2주 전까지 내 사무실에 찾아오는 기행을 저질렀다.


나라를 바꾼 이후에서야 비로소 그 불안을 떨칠 수 있었다. 무수한 책들이 나르시시스트 학대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 삶과 내 내면을 다 허물어 뜨리고 다시 쌓는 거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점에서 이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 경제적인 연결고리 끊기:


상징적인 경제적 연결고리 또한 엄청난 족쇄가 된다. 전혀 무시할 수 없다. 나르시시스트들은 노년에 접어들면 더더욱 자식에게 기생하게 된다. 자녀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그렇게 착취당하면서 산다. 부모 앞으로 정기적으로 돈이 들어간다거나 공동자산이 있다면 집을 나와 독립해도 온전한 독립이 아니다.


부모와 내가 공동 소유한 집에서 내가 나왔고 그들은 그곳에 계속 살면서 내 이름으로 받은 은행 융자를 갚아가고 있었기에 이것이 주는 스트레스가 어마했다. 이들이 사고를 치거나 한다면 그 타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아직도 공생관계와 가까웠다. 변호사를 끼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나는 비로소 자유의 일부분을 되찾았다. 이젠 이들이 어찌 되든 간에 내가 알바가 아니게 된 것이다.


부모가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자식을 통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심보는 흔히 이런 집 장만으로 이어진다. 자녀는 나중에 이런 것에 휘말려 들어서 정작 자기 가정 꾸리는데 타격을 받는다거나 공제받을 혜택도 못 받게 되거나 아예 나아가 융자를 못 갚아 파산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주변에서 이런 케이스를 자주 보는데 제발 한국사람 정서 탓하지 말고 당신네 부모의 속내를, 그리고 그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분위기를 제대로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예를 들어 내 외가 쪽은 유산을 더 차지하려고 막내를 정신병동에 가두는 짓도 불사하던 사람들이 득실거리던 곳이다. 전쟁통에 찢어지게 가난해서 집 장만이 꿈이었다고? 내 엄마와 그 형제들을 보면 획일화된 가난의 레퍼토리보다 어찌 서로를 등쳐먹는가가 더 팽배하다. 가난하다고 다 서로를 찔러 죽이지 않는다.


이런 가정이 이렇게 될 때 가난은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물이다. 서로를 약탈하고 자신의 것만 챙기며 서로를 조롱하며 자신의 에고를 채우는 이들이 가족을 구성하면 집안은 어떻게든 풍비박살이 나게 되어있다. 대대로 정서적, 물리적 학대가 되물림되다 보니 동네에 비석까지 세울 정도로 돈이 많던 집안은 내 엄마대에 와서 거덜이 났다. 엄마는 어릴 적 자기 집이 가난해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났고 우리 집 또한 가난해서 화목하지 않다 했다.


하지만 있던 돈도 방석집 오입질에 다 써먹은 것은 여자에 미친 내 외할아버지였지 절대 가난이 아니었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배가 부른 외할머니는 친정에 쌀을 꾸러 갔지만 내 외증조모는 문전박대를 했다. 그 길로 어디도 기댈 데 없다는 생각에 곧장 독풀을 먹어 아이를 유산시켰다 했다. 이런 살벌한 인간들을 간단히 가난이 그렇게 만들었다 할 수 있나.


이렇게 자신의 가정을 일반화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 가족 간에 경제적인 이득을 계산하고 서로를 이용하려 드는 관계가 어찌 보면 인간의 제일 추잡한 민낯을 보는 계기가 아닌가 싶다.


지속적인 상담과 서포트:


상담 치료는 중요하다. 억제하고 있던 트라우마를 더 발현시켜서 삶을 거의 몇 주간 정체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해나가야 한다. 이전의 삶은 지옥이었고 플래시백에 영문도 모르고 시달리던 몇 년간은 연옥이었고 수년간에 걸쳐 세상, 그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인연. 이 또한 중요하다. 이리저리 재지 않고도 온전히 나 자신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쩜 부모복만큼 중요하다. 새로운 인연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소통하고 감정을 공유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나가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닮고 싶었던 우상, 아니 환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