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개 May 14. 2022

병동에서의 시간이 트라우마가 될 줄은

첫 번째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트라우마가 드디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십수 년을 꽁꽁 싸매 둔 기억이지만 이전에 내가 소화시킨 다른 기억들처럼 언젠가는 직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번 풀어 보려고 한다. 이 기억은 상담 때 언급만 해도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어떤 단서만 봐도 일주일을 멘붕 상태로 지내게 한 엄청난 파급력을 가졌다. 일단 22살부터 27살에 걸쳐서 일어난 트라우마들이 다 뒤엉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략 22살 때쯤부터 CPTSD의 대표적 특징이자 방어기제인 자기혐오를 기반한 완벽주의가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학교의 성적은 바닥을 치고 실패를 받아들이면 더욱더 나를 혐오하게 될 것을 알기에 이를 피하고자 결석을 하기 시작했다. 잦은 휴학과 재수강을 위한 복학이 계속되면서 내 능률은 더 바닥을 기기 시작했고 사람들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대략 25살이 되어 겨우 학사 졸업 후 이것 가지고는 변변치 못한 직장을 가질 거 같다는 생각에 석사를 시작했고 이러면서 이 우울증은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낮과 밤이 바뀌는 생활이야 대학교 시작했던 19살부터 늘 했던 것이지만 스물 중반에는 눈을 뜨고 있어도 몸에 힘이 없고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학업을 한답시고 의자에 10시간을 강제로 앉아 있었지만 산송장 수준이었다.


나는 이 시절 낮과 밤이 바뀐 것을 우울증을 악화시킨 원인으로 단순히 보지 않는다. 명백히 짚자면 ‘나는 남들보다 못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적어도 두배 이상을 노력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나로 인해 식음도 전폐하고 의자에 앉아 있게 했으며 이런 자기 고문이 낮과 밤을 바뀌게 한 것이고 이 사이클이 반복이 되면서 극심한 우울증으로 변한 것이다. 이 시기에 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은 나머지 목으로 물을 넘기는 것조차 용납이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악독한 시어머니 같은 내 엄마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고문을 내가 나에게 스스로 하고 있었단 셈이다.


이 시기에 나는 CPTSD 환자가 겪는 이인증과 극심한 우울증 환자가 겪는 환청을 동시에 느꼈다. 우울증이 극심해지면 단기간 조현병 환자가 겪는 그런 증상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정말 자신의 귀에 도청장치가 있어 나를 감시하고 나를 미워하는 메시지를 내 머릿속으로 집어넣는다는 생각을 한다던지 일자로 된 병동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이곳이 미로 속인 거 같아 우회전 두 번만 꺾으면 출구가 나오겠지 이런 생각을 한다는 등. 조현병의 가족 이력이 없어도 그냥 우울증 만으로도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도 집에 있을 때 차마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것도 허락할 수 없어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으면 ‘왜 사느냐’, ‘ 이런 벌레 만도 못한 존재가 될 바엔 그냥 나가 뒤지는 게 낫지 않냐’ 같은 메시지가 진짜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그냥 스치는 생각이나 감정 상태가 아닌 제삼자가 내 귓가에 대고 하는 소리처럼.


그해 크리스마스 때 이틀간 응급실 신세를 진 후 몸이 굼떠지고 살이 붙는 게 눈에 보여 약 복용을 소홀히 해서 4달 후에 병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게 되었다. 저번 응급실의 분위기를 예상하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두 번째 방문은 어찌 보면 도움이 되었다기 보단 그것 만으로 트라우마였다. 그때가 아마도 대학 시험 시기인가 그랬을 텐데 일단 접수하고 기다리는데 7시간이 걸렸다. 나는 살고 싶어서 보는 간호사한테 내 인생 서사를 다 쏟아 내기 시작했는데 간호사 한 3명을 거치고 나니 내가 무슨 도움을 받을 거라고 이런 얘기를 했나 싶더라. 그 와중에 엄마란 년은 여기저기 다 쑤시고 다니는 척 호들갑을 다 떨었지만 정작 필요한때는 코빼기도 안 보였고.


정신건강 응급실이라고 나를 데려간 곳은 일반 집 거실 만한 곳에 침대 한 7개가 구겨져 있고 중간에 소파, 간이침대, 휠체어 등등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 위로 얼굴이 퉁퉁부은, 생기가 없는 젊은 사람들이 다 널브러져 있었고 일부는 멍하게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옆에 장롱 하나 뉘이고 사람 서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벅찬 폭의 쪽방 같은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병원에선 나에게 침대가 없다면서 체조할 때 쓰는 매트를 가져다주며 약 먹고 누우라 했다. 잠을 청하는데 대략 20분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때 오만 생각이 다 스친 거 같다. 마치 내 환청 속 목소리처럼 진짜 벌레보다도 못한 처지로 강등당했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고, 이곳에서 나는 진짜 머저리로 낙인이 찍혀서 다시는 인간 세상에서 어떤 구실도 하지 못하겠구나, 어떤 걸 예상을 하든 그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으로 연결되는구나, 평소 때는 아무 관심도 없던 엄마라는 인간은 왜 오늘은 이렇게 호들갑을 떨까 등등. 그냥 학습화되었던 무기력감과 절망감이 그 날밤 최고점을 찍었다.


바닥에서 잠을 청한 뒤 간호사가 와서 나를 깨웠고 이곳엔 침대가 더 없기 때문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맙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정신이 없었기도 했지만. 왜 저번엔 하룻밤만 자도 되었는데 이번엔 어디로 나를 데려간다는 것인지. 사이렌도 키지 않은 앰뷸런스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으면서 절망감은 공포감으로 바뀌었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창문도 틴트 되어 있고 밖 또한 어두우니 그 두려움은 계속 증폭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병원에서의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에서 더 멀어진다는 이야기일 뿐인데. 정말 이모할머니처럼 나도 병동에 갇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고 동네 미친년으로 손가락질받으면서 살 것인가? 아마도 그게 제일 큰 두려움이었던 거 같다.


그 두려움은 현실로 다가왔다. 정말 무겁고 두꺼운 창살 문이 더 얹어진 폐쇄 병동에 도착한 것이다. 내 몸 뚱 아리가 인수인계가 되고 나는 약기운에 의해 거의 자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병실로 떠밀려 들어갔다.   에어컨 윙윙거리는 소리에 생각마저 다 잠겨버리는 듯했다. 정말 추웠는지 두려움에 몸이 굳어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침대는 마치 도축하는 스테인리스 테이블 같았다. 그 차가운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부모로 인해 불법체류자에 가진 것 없는 상태로 추락한 것을 온전히 내 힘으로 한번 고쳐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나는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그렇게 악에 받혀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지는 이런 신세밖에 되지 못한 것. 그게 너무 억울했지만 난 더 이상 현실과 맞짱을 뜰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눈물은 하염없이 나왔지만 울먹일만한 힘이 내 울대에 남아 있지도 않았고 그렇게 마취당한 것 마냥 웅크리고 누워 베개를 젹셨다.


폐쇄병동에서의 생활을 내가 트라우마라고 느낀 것은 지극히 내 관점에서 내린 판단이다. 어떤 차별이나 부당대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상처로 남았다. 이를 겪지 않은 이들은 뭐 이 시간을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죽음에서 건져 주지 않았느냐 할 텐데. 환자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돈 없는 국립 병원이다 보니 환자들을 수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개별적으로 환자들을 도울만한 어떠한 프로그램도 없었다. 환자들은 하루 대부분을 알아서 때워야 했다. 사람들은 그냥 위험 레벨에 따라 병실에만 있어야 하는 부류, 복도로 나올 수 있는 부류, 거실로 나올 수 있는 부류, 오락실로 나올 수 있는 부류 그리고 외박을 할 수 있는 부류로 나눠져서 다들 저마다 정해진 공간을 배회하기 바빴다.


총 두 달 남짓 있었던 시간 동안 나 또한 방부터 시작해서 복도로 나오는데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고 거실로 나오는 것조차도 2주가 걸린 거 같다.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오락실로 나가 볼 수 있었고 내가 퇴원하기 한 주전에서야 나는 간호사 통솔 아래 잔디를 밟아 볼 수 있었다. 거실에는 시간을 때울 것이 훨씬 많아 보여 복도를 다니면서도 내게도 저길 들어갈 기회가 주어질까라는 생각에 젖었다. 거실 벽 너머 흐릿하게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 그리고 사람 손을 거친 지 한참 오래되어 보이는 빛바랜 80년대 추리소설, 낡아 빠진 아동서적, 사전, 성경책들, 그리고 직소퍼즐 같은 것들. 하도 절망적이어서 그런지 그 거실에 있는 쓸데도 없는 그런 것들 조차 나에겐 허락이 안 된다는 생각을 자동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살 위험으로 분류가 되면 방안에 어떠한 소지품도 거의 허락이  된다. 플라스틱 조차도 깨서 목을 그을  있기 때문에 상주하는 간호사 호출을 해서  사람 눈앞에서 사용하고 반납을 해야 한다. 요새는 시설이 좋아졌겠지만 병실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랑 침상 서랍이었나 아니면 의자가 있었나 싶은데.   없이 병실 안을 계속 돌다가 약기운에 뻗어 누워 있는  반복했다. 죄를 지어서  것도 아니고 아파서 산송장이 되었다는데 거기서 겪은  교도소 보다도  허술했다는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병실은 그렇다고 해서 문이 잠금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감사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자부터 자살 위험군, 헛것을 보는 사람들 성별을 거리지 않고 같은 곳에 다 수용이 되어있다 보니 잠에 드는 게 두려웠다. 다행히 간호사 입회 하에 다들 한 줄을 서서 약을 입에 다 털어놓고 병실로 돌아갔으니 다들 약에 취해서 엄한 짓을 하겠냐만은. 그냥 그런 것도 나에겐 위협적이었던 거 같다.


우울증을 겪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가장 최악의 환경이 머릿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끔 고립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 입원을 하고 며칠간 방에 갇혀 있을 때 그 생각의 사슬에서 헤어나 올 수가 없어 그 고통스러움에 절규하면서 온 몸의 진을 빼는 것이 하루에 두세 번 반복되는 일상이 이었다. 그냥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나는 미친 인간으로 엄마에게 낙인이 찍힐 것이고 세상이 나를 쉽게 짓밟을 수 있고 이 엄마란 인간에게 평생 종속되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레퍼토리였다.


병동에서 생활은 그 사이클을 더 악화시켰으면 더 악화시켰지 좋게 만들지는 못했다. 약기운에 취해서 더뎌지긴 했지만. 항우울제는 없는 자존감을 만들어 주거나 자기혐오를 지우는 약은 아니다. 특히 cptsd 같은 경우 경험자로써 가장 뿌리 뽑기가 힘든 것이 뭐라고 물어본다면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솔직히 이 사고방식을 고치는데만 트라우마를 몇 개를 프로세싱을 해야 하고 생활의 습관을 고쳐야 하는지 짐작도 안 간다. 어느 의학 책에서 아님 논문에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해서 나를 마치 부모같이 무조건적인 사랑 해줄 사람을 만나도 안 고쳐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고질적인 문제이고 놔두면 우울증의 수렁으로 다시 끌고 들어가는 부분이라 가장 위험한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그런 상태에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못한 것은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 (그때는 그냥 뭉뚱그려 세상이라고 칭했다)에게 나는 너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음이었다. 난 태어나 살아온 환경, 나를 괴롭히고 멸시하던 사람들, 내가 닥친 사고와 문제들 그 어떤 것도 나 스스로 택한 적이 없었고 원치 않던 쓰레기 더미가 떠넘겨진 거나 다름없다 보니 그걸 다 헤쳐 나오고 싶었다. 십수 년이 지난 뒤 생각을 해보니 이것 또한 그냥 그 시절 어리고 뭘 몰랐던 애가 합리화하면서 만든 생각이더라.


본질적으로는 엄마에게 성공으로 나를 이런 극한의 환경으로 몰아세운 것에 대해 갚아 주고 싶었다. 그 나이 또래 애가 별생각 없이 할 법한, 성공해서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거야 이런 생각을 엄마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주권 계류 상태에서 내 앞으로 유학생 등록금을 지불하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내던 엄마 모습이 대학 생활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걸 포기를 하고 고졸 상태로 돌아가면 이 여자가 어떤 식으로 나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려 들까.


6년을 은따를 당하고도 학교를 못 바꾸고 견뎌내고, 특화고로 진학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비자 때문에 날려 먹고, 고등학교 내내 한 푼도 안 쓰고 단벌 유니폼으로 그렇게 양보에 양보를 하며 거지같이 졸업을 했는데. 자식 하나에게 딱 한번 들어가는 돈이 그렇게도 아까웠나 싶어서 그냥 이 여자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가장 최악의 문제는 엄마의 면회였다. 이 여자는 매일 같이 나를 찾아왔다. 솔직히 상담을 6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기억도 희미했지만 이게 그 시절 병동에서 내 치료를 방해한 큰 요소였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서플라이를 24시간 통제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놓고 있어야 한다. 내가 집에 없으니 이 여자는 안달이 나서 매일 같이 면회를 하고 매일 같이 내 방에 들어와 모든 걸 다 훑어보고 주마다 의사가 오면 말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다 그걸 알아야 한다면서 통역사까지 불러왔다.


만약 내 주변에 엄마란 인간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병원은 당연히 면회를 불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문제를 만들면 부모의 추방으로 인해 나는 정신도 온전치 않은 마당에 길거리로 나앉게 생겼으니 모든 것 불사하고 호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다 각색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와의 면담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엄마는 내 입막음을 하고 나를 갖고 노는데 확실히 성공했다. 폐쇄병동의 그 높은 철창도 무슨 벽돌 한 장 높이 담벼락처럼 드나들며 세상 착한 엄마 행세란 행세는 다 하면서 자기 집에서 나를 통제하듯 병원에서 조차도 나를 통제했으니.


병원에서는 나보고 세상만사 다 뒤로하고 쉬기만 하라면서 그렇게 문까지 걸어 잠겄는데 엄마란 년은 그것조차도 무시하고 의료 시스템을 농락하고 나를 갖고 놀았다. 나는 어떤 말도 못 하고 울기만을 반복했고 이럴 거면 그냥 집에라도 돌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뭐 나중에는 몰래 전화기까지 들여와서 내 아빠가 운전하다가 사고를 쳤으니 보험 처리하게 전화를 해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그 시절 나는 항정신제 때문에 안면 마비가 와서 입에서 침이 줄줄 샜는데 뭐 퍽이나 전화를 돌릴 수 있겠다. 정원 구석에 숨어서 결국 전화를 했지만. 뭐 이년이 그런 것까지 알면 내가 연을 끊었겠나. 초밥 한 박스 밀어주면서 특식이라고 그거면 됐지 않냐며 눈웃음을 갈길 때 머리를 깨부수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상담할 때도 혀를 내두를 수준의 악성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니 말은 다 했지.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