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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Aug 12. 2022

플래시백

정신건강을 이야기할 때 항상 화두가 되는 게 있다면 극단적인 시도나 자해 등 이런 자극적인 부분이다. 나 또한 그랬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마음이 아파서’ 생긴 병이 있다고 해서 매일마다 죽음을 생각하는 건 아니고 폭발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단조차도 꺼려하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본인이 만성적인 기분장애나 인지/인격장애인 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꽤나 많을 거 같은데 그들이 매일같이 극단적으로 일상을 살아간다면 세상에 사람이 남아나겠는가.


내 정식 진단명은 범불안장애이다. 만성적으로 불안이 지속이 되면 이것마저 그냥 일상이 된다. 이십 대 말까지만 해도 내가 겪는 불안이 이상적으로 통용되는 수준의 불안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순환이 정상일 거라고 굳게 믿어왔다. 큰 외부적인 스트레스 요소가 없다는 전제하에 일상의 대부분은 남이 보기엔 너무 단조로워 보일지도 모른다.


기분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다 단순히 한 가지의 병명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하나 더 얹은 게 c-ptsd이다. 복합 ptsd는 그냥 불안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 내 삶에 플래시백이란 지뢰를 심어 놓는다고 보면 된다. 지뢰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어도 플래시백이 어떤 장소와 시기에 오는지 예측도 할 수 없고 설사 오더라도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플래시백이 소환되는 과정

이 만성적 불안이란 감정, 아니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신체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는 이 현상은 정말 가랑비에 옷 젖듯 은은히 스며든다고 보면 된다. 이미 불안에 적응이 되어서인지 웬만한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도 불편함이 불쾌함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만성적인 불안상태가 지속되다가 트리거로 인해 플래시백이 소환될 때가 있다. 플래시백이란 과거 트라우마를 당했을 시기의 감정 상태, 신체 상태, 공간 인지 능력 같은 것이 거의  소환되어 특정한 시간 동안 과거에 갇히는 인상을 받는  말한다. 삶에 있어 노출된 트라우마 마다  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따라 이인증을 느낄 수도 있고 패닉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제일 취약했을때는 나는 이인증 같은 현상을 주로 겪었는데 하루엔 서너차례도 겪었고 그게 주로 활개치는 기간이 몇주에서 몇달은 간다.


플래시백이 촉발되는 이유, 그 트리거들은 불안과는 좀 다르다. 흔히들 불안은 ‘생각’에 의해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플래시백은 더 복합적이다.


감각: 신체로 느끼는 감촉, 냄새, 온도차 그 외에 내 신체에 가해지는 특정 압박이나 취하게 되는 동작 같은 것들


감정적 기억 소환: 무의식/잠재의식에서 스쳐가는 과거에 느꼈을법한 느낌.  뚜렷한 이미지를 동반한 기억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잔상이 소환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트라우마를 겪기 전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깝깝하고 찌뿌둥한 감정이 오늘 들었다. 의식적으로 나는 그 둘을 연관 지을 수 없지만 플래시백은 무조건 소환되는 것이다.


이 감정의 잔상이 무의식으로부터 날아올 경우엔 내가 이 감정을 파악하기 전에 이미 플래시백이 올라온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 소환: 트라우마를 떠올릴 만한 물체나 장소, 이미지, 인물들을 마주쳤을 때이다.


스트레스나 현재 감정 상태: 불안이 장기간 계속되면 집안의 대소사라던지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주는 스트레스에 보통 사람보다 극도로 취약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결과적으로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건데 그 어떤 것도 내 생각의 방향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컨트롤 범주안에 드는 게 없다고 보면 된다. 집에서 은둔생활을 해 외부요인을 모두 차단한다고 해서 플래시백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플래시백은 정말 어떤 패턴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나에게 있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힘든 때는 불안할 때가 아니다. 불안이 일상이면 그 불편함도 일상의 부분이 된다, 불편함이 불쾌함이 되고 불쾌함이 고통이 될 때는 이미 플래시백 그 내핵에 들어와 있을 때이다. 불편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것과 현실과 동떨어져 과거에 몸이 갇혀버린 듯 사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면 ‘이러다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 4년 전까지만 해도 감정이 격해져서 이틀을 내리 울면서 지내본 적도 있다. 그 시기에도 죽음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최근 들어 플래시백이 진을 쳤을 때 죽는 게 낫다고 딱 한번 생각했었을 때가 있긴 있었다. 비관적 생각의 사슬에 미친 듯이 휘말려 들어가다가 문득 지난 6년간의 치료과정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플래시백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내가 느끼는 취약함, 나약함을 인정하지 못해 그 플래시백의 늪으로 나를 더 밀어 넣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인데. 지금 그나마 조금 더 맑은 정신으로 보면 나 자신에게 그런 요구를 했다는 게 기가 찰 노릇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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