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호감을 표현해 왔지만 알아채지 못했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고백이란 걸 해왔지만 철저히 무시했던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름 인생에 있어 목표가 뚜렷했고 그걸 실천하기 위해 또래보다 아등바등 살았다고 자신했는데 내 삶은 철저하게 사랑 중심적인 삶으로 바뀌어 갔다. 정말 늦바람이 무섭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남자친군 내게도 잘했지만 내 아킬라스건인 엄마에게 특히 잘했다. 엄마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느라 좋아하시는 여행도 제대로 못 가보셨다는 내 말을 듣곤 엄마를 모시고 여행도 자주 가주었으니 말이다.
나를 넘어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 언니들에게도 자상한 이 남자에게 빠져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때의 난 그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그와 함께라면 어떠한 미래가 와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가 더 좋아졌고 또, 많이 의지하게 됐다.
연애를 시작할 때 대학생이었던 남자친군 직장인이 되어 사회에 적응해 나갔고, 일을 시작하고 2년쯤 지나 사회인으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우린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네 번의 계절이 바뀐 따사로운 어느 봄날, 4년 2개월의 긴 연애를 마치고 약속대로 우린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연애와 달랐다. 어떤 이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하며 남자들은 결혼하면 바뀐다고 맞장구를 칠 테지만 내가 말하는 다름의 의민 그런 게 아니다.
남자친군 정식으로 가족이 되니 더욱 자상하게 날 챙겼다. 하지만 연애와 결혼이 다른 이윤 또 다른 가족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연애할 땐 둘만의 문제가 가족 간의 문제가 되니 결혼에 있어 책임감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마음가짐 하나가 조금은 더 어른스럽고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 바뀌게 한다는 걸 결혼 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또, ‘애는 언제 낳으려고?’ 하며 원치 않는 관심을 보내는 주변인들이 많았다.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일 수 있는 2세 계획을 자기들이 왜 궁금해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주위의 관심을 떠나 나도, 신랑도 빨리 아이를 갖고 싶었기에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행히 결혼 한 달 만에 아이가 찾아왔다.
정말 기쁘고 행복했지만 그 기분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안주하던 20대의 삶이 지나고 결혼을 하며 시작된 새로운 삶에서 오랜만에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며 직장을 그만뒀기에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는 것, 그게 내 목표였고 그걸 이루기 위해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가 필요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랴, 임신으로 인해 쏟아지는 잠을 참아가며 공부하랴, 멋진 살림의 여왕으로 등극하기 위해 노력하랴. 그땐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욕심이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찾아온 아이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고, 난 아이를 유산하고 말았다. 신랑과 가족들은 우리 아이가 아니었을 거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며 위로했지만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난, 이직을 포기하고 나를 돌보며 남편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아이가 다시 찾아와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아이는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갖고 싶어 병원까지 다니며 노력했지만 어떤 시술을 해도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난 고민이 깊어지고 죄책감마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며 아이를 기다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이번주가 벚꽃이 절정이라던데 꽃구경 갈까?”
신랑은 한창 만발해 지천에 흐트러지게 핀 벚꽃을 보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기분 전환도 할 겸 신랑을 따라나섰지만 예쁜 꽃을 봐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다. 축제 기간이라 피날레로 폭죽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난 왜 이렇게 아이에게 연연하는 걸까?’
예쁜 꽃을 봐도 기쁘지 않은, 밤하늘에 예쁘게 수놓아지는 폭죽을 봐도 행복하지 않은 내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에 연연하고 있는 것 같아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루고자 했던 일은 어떻게든 노력해서 이뤘는데 처음으로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단 걸 뼈저리게 느꼈던 봄밤이었다.
그날 난, 아이 갖는 걸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너무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렵게 떼며 신랑에게 말했다.
“정말, 나만 있으면 되는 거야?”
신랑은 아이에게 연연하는 내게 가끔 말하곤 했다. 나만 있으면 된다고. 난 그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자 신랑은 정말 나만 있으면 된다고,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살자는 말을 해주었다.
우린 눈물을 흘리며 아이를 포기했다. 그리고 아이를 기다리며 불행하게 살기보다 둘이 재밌고 행복하게 살자며 아쉬운 맘을 위로했다.
그런데 힘든 결심을 하고 정확히 한 달 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 천사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몸이 어딘가 이상하고 월경 날짜가 지나 임신테스터를 해보니 선명한 두 줄이었다. 당장 병원으로 가 선생님께 확답을 듣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병원을 가도 아기집을 볼 수 없다는 걸 무수히 많은 임신 출산 육아 관련 사이트에서 셀 수 없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더디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쯤이면 아기집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조금 빨리 온 것 같다며 피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우린 피검사 후 다음날 유선으로 알려준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오래 기다린 것에 비해 고작 하루였지만 마치 열흘을 기다린 것처럼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흘렀다. 그리고 다음 날, 기다리던 전화가 걸려 왔다. 간호사 선생님은 피검사 결과 임신이 아주 유력하지만 확실한 건 2~3일 뒤 다시 내원해 아기집을 확인해 보자고 하셨다는 원장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우린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가 끊기자마자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확실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축복이 찾아왔음을. 누군가에겐 쉬운 일일지 모르지만 우린 너무 간절했고, 그 간절한 일이 일어난 건 정말 기적과도 같아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아기집을 확인하곤 다시 한번 축복을 보내주심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신랑과 난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아이가 배속에서 잘 노는지, 혹여 이상은 없는 지를 늘 노심초사하며 더딘 열 달을 보내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기가 태어났다. 너무 소중하고 또 소중한 예쁜 공주였다.
딸은 비교적 순한 편이었지만 육아는 정말 힘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지정된 업무를 하고 퇴근 시간이 있던 직장인의 삶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며 나와 눈을 맞추고 내 얘기를 듣고, 날 엄마라고 부르며 점점 의사소통도 가능해지는 아이를 보면 알 수 없는 힘이 생겼다. 나름 보람도 느껴지고.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내 아인 나에게 기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 누릴 수 있었던 꿀 같은 자유시간을 보내며 아이 엄마로서의 삶에 또다시 안주했다.
가끔 무료함 속 존재하는 우울함으로 인해 고민 끝에 다시 일을 하려고도 해 봤지만 난 다시 현실과 마주했고, 현실 앞에 굴복하며 그 생활에 만족해야만 했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공백기, 흘러버린 시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