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작년 3월 중순 즈음 뵈었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못 뵌 지 2년이 되는 걸까요. 아니, 기억이 났어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여름에 뵈었습니다. 7월 초, 중순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 날을 돌이켜보자면 저는 그냥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죠. 휴학을 하면서, 그림을 멀리하면서 선생님께 연락드리는 게 무섭다는 게 변명이 된, 부끄러운 마음으로요. 저는 단기 계약직으로 미술관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날은 근처 친구의 작업실에 놀러 간 날이었어요. 밥을 먹고, 그림 얘기를 하고, 작업실 구경을 하며 보내던 하루였어요. 작업실엔 두 명의 친구가 있었어요. 선생님은 모르시는, 학부 후배들이에요. 둘 다 열심히 작업하고 지내는 친구들이에요. 언젠가 이 친구들이 같은 대학원으로 들어온다면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어요. 감정적인 이슈에 민감한 저와는 달리 이 친구들은 형식의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요, 선생님께 배울 것들도 많아 보였거든요. 아무튼 한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 다른 친구가 급히 핸드폰을 보여주었어요. 저에게 폰을 보여주기 전 서로 화면을 보고 고민을 하는 듯한, 갑자기 제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보였어요. 저는 저와 상관없는 일에는 일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갑자기 당황한 기색으로 제 눈치를 보는 게 이상했어요. 차라리 안 보았으면,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그냥 그럴 일 자체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뵐 일이 될 줄은 하나도 몰랐네요.
자전거랑 술을 좋아하던 선생님. 술은 좋아하시면서, 그림을 그렇게 그리셨으면서 담배는 끊으신 건가요? 왜 안 피우시는 지 여쭤본 것도 같은데, 그것만은 영원히 알 일이 없겠네요. 그림과 멀리하던 중 한 번 선생님을 뵌 적이 있었죠. 20년 여름, 아르코 미술관에서. 도망치듯 휴학한 저를 기억해주시고 불러주셔서 내심 정말 감사했어요. 선생님은 저의 마음을 아시는 지 모르는 지, 제 작업에 대해 궁금해 하시고 관심 가져 주셨어요. 제 그리기 방식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말씀해주시면서 그 생각을 왜 갖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셨어요. 저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 말씀을 들었고, ‘선생님 저는 도망쳤어요.’란 말을 목젖 뒤에 숨기고 감사하다고 얘기했어요. 그리고 다음 기억에 남는 선생님의 이야기는 다른 형과 등산에 대해 대화하는 게 마지막이네요. 그 술집, 안주, 제 오른편에 앉으셨던 선생님, 분위기, 조명의 밝기 등이 아직도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제가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그 장면, 그 분위기는 왠지 재현하지 못할 것 같네요.
그 후로 저는 더 방황의 시간을 지내다가 자퇴를 하고, 선생님의 옛 제자 중 하나였던, 오래 만난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지금은 직장을 구해 곧 일을 나가는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뵈었을 땐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적처럼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그리지는 않지만, 조금씩 기운, 시간을 쪼개서 하나씩 천천히 만들어 냅니다. 지금은 그리기가 즐거워요. 일상에서 벗어나서, 원래 제가 있던 영역으로 돌아가는 기분이거든요. 그렇게 소풍 간 기분으로 그림을 완성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요. 이런 루틴이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요. 저는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셨던 것 만큼 적극적으로 그리기를 실천하지 않아요. 저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는 걸 지금은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용기의 문제, 마음의 문제라고 치부하면서 2년을 나름대로는 힘들게 보냈습니다. 직장을 구하고 나서야 겨우 동굴의 밖으로 나온 기분이 들어요. 무얼 하든 어렵고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그림에서 발휘하지 못했던 용기를 어디선가는 쓰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용기를 내는 일은 바꿔 생각하면 의미를 찾는 여정인 것 같아요. 이 길의 앞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에 항상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품지만, 흐르는 시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우선 발을 때야 하니까요.
선생님이 가시고 마지막 얼굴을 마음에 새기며 저는 소주 한 병을 사 집으로 갔어요. 반병을 마시고 잤어요. 망가진 컨디션으로 일을 했고 그 날은 비가 우수수 떨어지는 장마 중 하루였어요. 그 즈음 저는 선생님께 편지를 쓰려고 시도했어요. 하지만 이상하게 글이 시작되지 못하더라고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던 것 같기도, 글을 써서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상했어요. 건강하신 사람, 장수할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요 당신은. 선생님과 대단하게 가까이 지내진 않았지만, 뵙지 못할 때에도 선생님은 저에게 좋은 친구였어요. 선생님의 가는 목소리가 아직 제 귀에 붙어있네요. 웃음과 함께. 고맙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전 아직도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제자지만, 제가 없는 중에도 관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를 지금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응어리를 빈 페이지에 쏟아내네요.
나중에 지면으로 다시 찾아뵐게요. 텍스트가 선생님께 닿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변명을 물질화시키는 일일 지도 모르지만요. 안녕히 계세요.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용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