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_ 님포매니악 감상
2022.1.31.
12시가 넘어가기 전에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글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내일이 올 진 모르겠다. 오늘은 넉넉한, 여유로운, 잉여로운, 하지만 부지런한, 여가의 시간을 보냈다. 실내자전거를 37키로 정도 탔다. 한 시간은 족히 넘게 달렸다. 실내자전거의 매력이라면, 다리는 달리는 상태에 두고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거다. 가령 책보기. 자전거를 달린 시간만큼 책을 보았다. 책 제목을 말하기는 싫다. 왜냐하면 너무 좋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알려주기 싫은, 다 읽지도 않았지만, 여태까진 너무 좋은 책이다. 가령 여태 나는 미술에 대한 책이나 소설을 주로 보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꽤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한국에서. 나는 잘 모르지만, 어느 인터넷 카페에서 유명했던 누군가의 가르침에 대한 책이다. 이정도면 꽤 힌트를 남긴 거지. 뭐, 이런 작은 일기 쪼가리를 몇 명이나 읽나 싶지만.(제 글을 열심히 보시는 분이 계시다면, 기분은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자전거, 독서와 함께 오늘을 가득 채운 활동은 영화 보기다. 지난주부터 계속 보고 싶었던, 님포매니악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안티 크라이스트를 보고 난 후, 되게 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그 사람의 영화를 최근에 접했지만, 첫 영화가 되게 인상 깊었고, 좋아서, 우울 3부작 중 하나라는 님포매니악을 보고 싶었다. 영화는 꽤 거대하다. 한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볼륨 1과 2가 있을 정도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처럼 큰 챕터로 영화가 쪼개지는 느낌이 아니라, 한 영화의 분량 때문에 나뉜 느낌이다. 족히 세 시간은 훌쩍 넘는, 네 시간은 될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거나 루즈해지지 않았다. 단편 드라마를 몰아서 본 기분이랄까. 영화는 솔직히 너무 좋았다. 이 영화를 한창 그림 그릴 때 보지 못했던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까지 너무 완벽했다. 인간의 추악함, 고독함, 외로움, 폭력, 슬픔, 웃음, 비참함, 성찰, 위선, 배반, 가학, 사랑, 모험, 격려, 어리석음, 소문, 대화 등 거의 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면면을 담은 영화였다.
한 카테고리만으로도 다루기 어려운데, 나에겐, 감독에겐 무리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지렸다. 솔직히 이런 영화를 보면, 되게 멍해지고, 소화해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금은 영화를 본 직후이니 영화에서 비롯된 감정만 쏟아내는 게 고작이다. (그렇다고 소화가 다 된 상태에서 대단한 분석을 할 수준도 못 된다.) 그냥, 지금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영화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 뿐. 물론 이건 취향의 문제다. 성적인 테이스트가 아니라 무거운? 영화를 보길 좋아하는, 영화 감상적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서. 안티 크라이스트와 연관되는 메타포들도 몇 보이는 것 같아, 또 연출 기법이 드러나서, 감독에 대해 이해되는 바도 더 짙어졌다고 느낀다. 고마운 사람이다. 친절하고, 무슨 선택이 영화에게 도움이 되는 지 잘 아는 사람 같다. 요즘 매주 영화 한 편씩 보려고 노력하는 데, 이 감독을 만난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 이런 챌린지를 하는 데 꽤 보람을 느낀다고.
전 여자 친구와의 연애에서 난 매주 영화를 보았다. 원래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아니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걔와 함께 있으면서 취향이 생겼다. 되게 많은 영화를 보았다. 함께 지낸 5년이라는, 전혀 짧지 않는 시간동안 많은 감독, 다양한 나라, 여러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오래 남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생긴다는 걸 몸소 느꼈고, 점점 오랜 동안 내 안에서 헤엄치는 영화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런 영화들은 무언가 영혼의? 뼈와 살이 되는 듯하다. 물론, 예술을 실천하지 않는 지금, 영화나 보고 있는 건, 기회비용이 클 지도 모른다. 영화 대여료, 시청 시간은 전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무언가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옅어진다고 느껴지는 감각들을 훑는 시간이라고 느껴진다. 아. 또, 어제 만난 친구의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환데, 걔는 영화를 복수전공한 데다가 나랑 영화 취향도 조금 달라서, 흥미를 느끼기도 한다. 조만간은 오늘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까.
셀리그만. 오늘 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굳이 따지면 조연인데. 주연급 조연이랄까, 아니 그 정도면 주연인걸까? 스포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긴 좀 그렇지만, 가장, 영화를 멋있게 이끌어준 사람이 아닐까. 지렸다. 이 사람 때문에 영화에 대한 좋은 감정이 큰 쓰나미로 변해서 나를 멍하게 만든 거다. 이 사람 덕분에 이 영화가 좀 더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영화들은 몇 가지씩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사람이다. 드러난 장면을 보면 내가 고맙다고 하는 게 터무니없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역대급 인물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좋고, 진작 못 만난 게 정말 아쉬운 거지. 라스 폰 트리에는 무슨 인생을 살았길래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걸까. 다시 작업을 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사람을 다루는 영화가 좋다. 아니 그런 예술이 좋다. 빨리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고 싶고, 잘 굴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건 언젠가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기 때문이다. 몰라, 너무 유치한 생각이지만 아직 나는 미련을 갖고 있나보다.
설 연휴를 아깝지 않게 보냈다. 내일도 나는 자전거 위에서 책을 볼 예정이다. 눈이 많이 온다는데, 믹스 커피를 뜨거운 물 조금에 녹인 다음, 따뜻한 커피 위에 에스프레소를 붓 듯 올려, 달달한 라떼를 마실 생각이다, 눈을 보면서.
행복하다. ,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