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 라이트 바깥의 일들

감춰진 자들의 삶

by 와이와이

최근 본 작품들은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과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네티즌 나인의 <일본vs옴진리교>, 팟케스트 <듣똑라>,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이다. (팟케스트 <이진우의 손의 잡히는 경제>는 제외...)




소설, 비소설, 라디오 모두 골고루 받아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원래 소설 위주의 독서습관이 있었지만, 편식이 좋지 않은 것과 비슷한 영향이 온다고 느껴 고치려고 하고 있다.


19년도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거의 다 보았다. 미친 듯이 본 것 같다. 색채가 없는 다자끼 쓰꾸루 이야기는 분량에 대한 부담이 없어 세 번 정도나 읽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한참 빠져있을 때, 너무 우울했다.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호흡이 다른 존재들과 세계의 등장은 이상하게 나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다. 개인사와 얽혀서 더 그럴지도. / 물론 그의 소설이 가리키는 지점이 다시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걸음걸이를 찾는 곳에 있는 점이 그것의 존재 이유지만서도.





각각의 장르와 상관없이 각 작품들은 사회, 역사의 핀 조명에 들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림자 속에 엉겨 붙어 있다가 특정 사건을 계기로 핀조명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모습들을 비춘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계기가 되어 인식의 전환, 파멸, 소멸 등의 형태 변화로 나아간다.


본디 그 것들은 매체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생활 모습(?)과는 다른 존재들이다. 여기서 잠시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항상 네임드아파트 라이프를 동경해왔다. 아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오래전 읽었던) 박해천 작가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근현대 도시 계획과 이행의 과정에 끼지 못한 우리 집 가정사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런 아쉬움은 이상적인 라이프 수준을 유지, 향유하는 사람들에 비해 뒤쳐진 느낌인 열등감으로 자라왔다.


마음 한켠이 이렇게 생긴 나로부터 최근 본 작품들이 동질감 혹은 관심을 끌어내기는 충분해 보인다. <검은 꽃>은 강점기 때 멕시코로 강제 노역을 떠난 각양각색의 조선인들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사회로부터 경시의 시선을 받는 가진 것 없는 청소년들을, <일본 vs 옴진리교>는 마쓰모토 치즈오와 옴진리교, 그들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들과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각각의 사후조치를, <백야행>에서는 주인공 남녀의 삶(특히 남주), <듣똑라>에서는 여성, 노동자, 식물 등의 모습들을(인상 깊게 들은 에피소드..) 집중해서 보여준다.


각각 보여주는 것들의 형태는 다르지만, 기득권이 아닌 존재들의 삶으로 읽힌다.

기득권의 그림자에 가려지고, 그들 편의에 따라 고통을 받는 모습들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서려 있다.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비추니 특별해 보이는 건가. 혹은 비참한 모습을 비추니 그림자가 더 어두워 보이는 건가.




눈을 떠보니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기차에 있네


어떤 식으로 끝이 맺어지든, 핀 조명 밖의 존재의 아등거림은 참 슬프다. 디폴트 환경이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더욱더 괴롭다. 저 중 가장 피부로 와닿는 것은 <듣똑라>에서 들었던 여성 인권에 대한 에피소드들. 한국 젠더 문제를 바라보면 화가 나고 답답하다. 이성애자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색안경을 끼는 분위기다. 평등은 이상에 불과한 것 같다. 우위를 점한 사람들의 까끌까끌한 시선 속에서, 존재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만만찮은 문제다. 요즘 그런 존재들, 그들을 향한 폭력에 관심이 쏠린다. 거기서 분노와 슬픔, 공허를 느낀다.




개인사로부터 시작한 폭력에 대한 작업과 생각들이 자신뿐 아니라 세상으로 폭을 넓혀가는 중인 것 같다.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외로움은 덜어지는 것 같다. 문장의 끝이 '같다.'라고 이어지면 안 좋지만,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여기저기에 비춰보고 담가보면서 나를 알게 되는 것 같다. 여기저기서 상처받고 또 (그것을 핑계로) 여기저기 상처를 주고 다니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항상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단 마음을 잃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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