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사라진 자리에서야, 마음의 진심이 들려온다
딸 셋이 동시에 말할 때, 엄마는 멈춥니다
세 딸을 키운다는 건, 늘 말소리에 둘러싸여 사는 일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엄마, 회색 바지 어디 있어?”
세수하러 가려다 “엄마, 오늘 보온병에 물 넣어줘!”
삶은 계란 한 입 물기도 전에 “엄마, 나 수채화 그리기 수업이라 붓이랑 손수건 챙겨줘.”
그나마 한 명씩 번갈아 말하면 다행인데,
가끔은 셋이 동시에 입을 연다.
큰애는 강의 과제나 봉사활동 고민으로 복잡한 얘기를 꺼내고,
둘째는 친구랑 다퉜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막내는 자기 그림을 봐달라고 소리친다.
세 방향에서, 서로 다른 감정과 톤으로,
“엄마, 엄마, 엄마!”
그 순간 나는 멈춘다.
진짜 멈춘다. 눈을 껌뻑이며 숨도 잠깐 멈춘다.
누구의 얘기를 먼저 들어야 할까.
어느 쪽 감정을 먼저 받아줘야 할까.
나는 뇌 속에서 빠르게 선택지를 분류하고,
감정의 무게를 저울질한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은 하얘지고, 마음은 눅눅해진다.
어릴 땐 육체가 먼저 힘들었다.
밤중 수유, 낮잠 재우기, 씻기기, 먹이기.
그런데 아이들이 크니까 이제는 마음이 먼저 지친다.
세 딸의 감정을 다 받아주는 일은
물리적 노동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엄마는 왜 내 말 먼저 안 들어줘?”
“언니 얘기는 잘 듣고, 나는 대충 넘기잖아.”
“나 그림 보여줬는데 왜 대답 안 해?”
나는 그저 멈췄을 뿐인데,
아이들 눈엔 내가 무시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자주 말한다.
“얘들아, 잠깐만.
엄마는 한 번에 한 명밖에 못 들어.
세 명을 동시에 사랑하지만, 동시에 이해하는 건 아직 못 해.”
그 말을 처음 했을 땐, 아이들이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다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하지만 동시에, 나도 인간이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고 싶지만,
가끔은 한 사람만 상대해도 벅찬 감정의 파도가 밀려온다.
딸 셋의 말이 동시에 들리는 순간,
나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잠깐 멈추고,
‘나’라는 사람으로 천천히 숨을 쉰다.
그런 날엔, 큰아이의 고민을 먼저 듣고
“너무 어렵지? 나도 그랬어”라고 다정하게 말해준 뒤,
둘째를 끌어안아 “속상했겠다”고 한참 토닥인다.
그리고 막내에게는 "네 그림 너무 멋지다, 엄마가 아껴서 볼게"라고 말하며 웃는다.
아이들은 결국 다 받아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마음이 진심으로 들렸다는 느낌을 원한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는,
나는 완벽한 엄마보다는 멈출 줄 아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때로는 세 딸의 목소리에 파묻혀 주저앉고 싶다가도
그 말들 속에 스며 있는 사랑을 알아채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딸 셋이 동시에 말할 때, 엄마는 멈춘다.
그리고 그 잠깐의 멈춤 속에서
다시 듣고, 다시 안고, 다시 살아간다.
엄마는 기계가 아니라서 멈추기도 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그 멈춤 덕분에 다시 연결된다.
오늘도 셋이 동시에 말하는 순간이 온다.
나는 다시 멈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잠깐만, 엄마가 차례대로 들어볼게.
너희 이야기는 다 소중하니까.”
느리게 피어도 향기 나는 삶을 꿈꾸는 ‘느린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