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
이성두︱시인᠊수필가
세상 끝날까지의 약속
오늘 문득, 책장 정리 중 한 권의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김연대 시인님의 제3 시집 「꿈의 회향」이었습니다. 표지를 들추니 좌측엔 시인의 소개가 있고 우측엔 ‘李成斗 청람淸覽 2002年 10月 11日, 著者 金淵大’ 23년 전의 선물이었습니다.
세월이 이리 흐르고서야 이제 세세히 펴봤습니다. 먼지를 탈탈 털며 펼치니 갈피 갈피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2002년 그해의 기억들이 시집에서 튀어나왔으니까요.
IMF 시절, 국가가 도산하고 기업이 도산하고 사업체가 줄줄이 도산하고 저마다 직장과 직업을 잃어버린 시기였습니다. 모두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날려 버리고만 시기였습니다.
나도 특별하지 않아서였던가 내가 가졌던 풍족에서 처음으로 처절한 궁핍을 만났습니다. 그래서였던가, 꿈틀거리면 꿈틀거릴수록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만 갔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버티면서 빠질 때까지 빠졌다고 생각한 나는 더는 뭐 어렵겠냐며 자위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누가 그랬던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그동안 내 살던 집과 싸늘하게 정을 떼고 눈물로 애정의 집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집과 나는 절대 분리되었고 나를 배신한 집도 아닌데 꼴도 보기 싫은 듯 그 부근으로는 가지도 않았습니다. 애써 눈길조차 두지 않고 외면했지요. 맨발의 천리행군이 시작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차가운 세상 위로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힘겹고 힘겨워 서럽고 서러워 엉엉 울며 눈물 꺼억꺼억 삼키며 “비좁은 남의 집에서 이딴 거 뭔 필요 있냐”며 모조리 버렸습니다, 책장 속 책들을 와르르 쏟아 내어 골목길에 내다 버린 숱한 책들, 어린 시절부터 읽어 보관해 오든 그 많은 책이며, 추억이 깃들고 꿈이 있던 소중한 것들마저 가릴 것 없이 모조리, 모조리 다 내다 버렸습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무지무지하게도 힘들었을 아내는 표정 없는 침묵을 지키다가 “책이 뭐 캅디꺼” 라며 덤덤히 만류했지만 내버린 집처럼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끝내 내 삶의 기억 모두를 와르르르 쏟아버렸습니다.
칼칼한 와이셔츠로 힘없고 돈 없고 서러운 목, 감추고, 그 서러운 목, 와이셔츠 사이로 행여나 약한 모습 누구에게라도 들킬까 봐 넥타이로 꼭꼭, 감춘 속 시린 날들이 시집 속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내 기운 빠질까 봐 그런 설움의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해 겨울 오히려 내게 추위에 떨지 말고 힘내라고 모스크바에서나 가져왔을 법한 고급코트 하나 몰래 사서 눈 폴폴 내리는 출근길에 불쑥 내어 엄니처럼 입혀 준 아내의 눈빛, 또렷이 기억합니다. 몇 번의 월세쯤이나 되는 비싼 코트를 어렵게 사준 것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땐 당장 기본적 생활까지 걱정해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처절한 고통의 시간이 있는 것조차 잊은 듯, 찢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도저히 뚫어지지 않는 거대한 담벼락에다 대고 돈키호테처럼 마구 달려들 때였습니다. 물론 그것 또한 아내의 가림막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소리도 없이 가는지 오는지 몰랐습니다. 날마다 “처음부터” “처음처럼”이라고 중얼거리며 걸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한량없는 고통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늘이여, 하늘이시여...” 소리치며 몸부림을 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2018년 10월 17일. 갑자기 아내가 내 눈앞에서 허공을 노려보며 쓰러졌습니다. 입에서 거품을 내뿜으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다급하게 119에 전화했습니다. 119대원은 전화상으로 내게 침착히 상태를 물으며 대응을 지시했습니다. 전광석화와도 같이 119대원들이 도착했고 구급차는 대구의 동서로 뚫린 달구벌대로를 달렸습니다. 그런데 길은 꽉꽉 막혔습니다. 한 생명이 죽고 사는 일인데 길 위의 차들은 꿈적도 않고 방관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올라라, 올라라, 인도 위라도 올라 달려라, 제발”이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복잡한 차도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앞다투어 길이 물길 갈라지듯이 열렸습니다. 순식간에 종합병원까지 도달했습니다. 감사한 일이었지요. 이 기회에 다시 한번 119대원들에게, 특정하지 않은 시민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냅니다.
응급실에서의 각종 검사 결과가 뇌출혈로 판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요?”
“수술해야 됩니다.”
“아니, 머리, 머리를 수술해야 한다고요?”
머리를 톱으로 썰거나 드릴로 뚫는 몸서리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네.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나의 하늘은 내려앉았고, 내가 서 있는 땅은 하염없이 꺼지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잃은 듯 허물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얼어 버린 북극 어느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고립이었습니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같이 초조한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수술실에서 나오는 아내를 만났습니다. 한쪽 머리칼은 사라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 감고 있는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로 이동하면서 만나는 짧은 순간이지만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잘 견디고 참아줘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내에게 끝내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 가족 모두가 언어장애인이 되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중환자 대기실에서 하염없이 대기해야 했습니다. 어떤 위급한 상황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대기실에서는 침묵으로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같은 날 수술한 다른 환자들은 2~3일 만에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긴급하고 위급한 상황으로 그때마다 돌발적 반응에 따른 치료로 3주간이나 중환자실에서 나오질 못했습니다. 먹는 것도 배신인 것 같아 거의 날마다 빈속으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희망의 언어를 되씹으며 찬 의자에 앉아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한 채 쫓겨나듯 재활병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 아내가 24개월 동안 재활병원에서 일어서려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재활을 위해 운동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일어나 걷질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예 서질 못합니다. 아니 누워서라도 온몸 이동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시라도 아내 곁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영영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평생 내 옆자리를 지켜준 것처럼 나 또한 옆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내, 가진 것 다 탕진을 한다 해도, 내일 아침 살아갈 양식이 다 떨어진다 해도 절대로 나는 아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에다 대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 “걱정하지 마” “세상 끝날까지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니까”라고 약속했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더 나빠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도 책 한쪽이라도 볼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어쩌다 남은 이 시집 한 권 읽는데, 17년이나 걸렸습니다. 나, 행여라도. 「꿈의 회향」을 읽고 읽어 이제 23년 전 어렵고 어려울 때의 그 한스러움을 소환하고 소환해 더는 소환할 것 없어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즈음, 아내가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 부축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만이라도 내딛는 그때쯤 아내와 함께 안동 한실마을 「꿈의 가출」, 「꿈의 해후」, 「꿈의 귀향」의 뿌리를 찾아보고 김연대 시인님도 만나 봐야겠습니다. 그런 후 나주에 사는 장진규 시인과 함께 남도 답사 일 번지 강진쯤에 다시 한번 더 가서 김영랑 시인도 만나고 모란이 피고 지고 하는 것도 살펴볼 여유 정도 가져 봐야겠습니다. 분명 우리 가슴 속에도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이 행복한 듯이 활짝 꽃피울 것을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