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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Jul 01. 2022

어느 파독 광부 노인의 한국 방문기

2015년 서울 시내의 어느 호텔에서 Sales 담당자로 근무할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일하던 호텔은 주로 단기~1주일 정도 묵는 투숙객이 70%이상인 전형적인 비지니스 호텔이었다.

그래서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손님과 크게 친해질 시간은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기억에 남는 손님 한분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2015년 6~7월 쯤, 갑자기 어느 분이 전화로 1개월의 투숙을 문의하셨다.

당시 일반적인 투숙 예약은 예약실 직원들이 처리를 했지만,

이렇게 장기 투숙을 문의하시는 경우 요금할인이나 개별적인 요청사항도 적용해드릴 수 있기 때문이 이런 경우는 세일즈 담당자가 배정되어 직접 핸들링 하는 것이 우리의 업무 방식이었다.


처음 전화를 통해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을때는 굉장히 연륜이 있고 당당한 힘을 느낄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통화를 이어갔고 고객은 독일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고객은 약 1주일 후에 한국에 오실 예정이었고 한국에 머무는 약 30일동안 우리 호텔을 이용하시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맺었다.


고객이 방문하시기로 약속한 날, 직접 프론트에 나가 고객을 맞이했다.

허리를 잘 펴지 못하시는 노부부 두 분이 오셨다.

먼 독일땅에서 여기까지 오시느라 피곤한 기색이 만연하셔서 일단 체크인을 도와드리고 짐도 객실로 직접 옮겨드렸다.


몇일이 지나고 고객과 조식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어 살갑게 말씀을 건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투숙 도와드린 영업담당자 입니다. 불편하신점은 없으세요?"

  "아 자네구만, 내가 한국말이 좀 서툴러서 미안합니다. 한국에 자주 못와서 말이야"

"아우 괜찮습니다. 한국은 좀 어떠세요 집보다 불편하시죠"

  "아니야 괜찮아요 옛날보다 좋아져서 깜짝 놀랐네 집보다 여기가 더 좋은것 같아"

"아~ 오랜만에 오셨구나 얼마만의 방문이세요 선생님"

  "나 글쎄 한 40년전에 나갔으니까.."


나는 조금 놀라면서 그렇게 한 30분정도 이야기를 더 나눴다.

 

 선생님은 40여년전 20대때 박정희 정부 시절 독일로 파견된 광부였다.

 그러면서 그 시절 찍은 독일 생활 사진과 한국의 서울 사진 몇장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하셨다.

 다행히 그동안 부모님은 함께 독일에서 모셨었지만 사는게 바빠 한국에는 한번도 못오시다가, 이번에 한국에 볼일이 있으셔서 들어오셨다가 나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년 이맘때쯤에도 한국에 와서 한달정도 머물 예정이라고 하시면서, 앞으로 내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꼭 고국에서 1년에 한달쯤은 있을 계획이라고 하셨다.  


 결국 선생님은 1년 뒤 이맘때쯤의 투숙 예약을 미리 하시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다음해,

 선생님은 다시 우리 호텔을 방문해주셨다.

 조금 더 쇠약해 보이시지만 목소리만은 밝게

 "미스터 리, 오랜만이네"


내심 너무 다행이었다.

당시에 선생님 전화번호를 받긴 했었지만 연락을 했던건 아니어서,

1년 사이 혹시 무슨일이라도 있는건 아닌지 염려했지만

다행히 선생님과 사모님은 다시 한국을 방문해주셨고, 나를 찾아주셨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객실로 인사차 방문한 나를 보시더니

"내가 미스터 리 주려고, 로렐라이에서 만든 좋은 술 한병 가져왔어 고마워"


그 술 한병이 뭐라고 참.

누가 아픈것도 아니고 만나지 못한것도 아닌데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객실을 나왔다.


그 다음해,

선생님은 혼자 오셨다.

"아이고 선생님 사모님은 같이 안오셨어요?"

선생님은 옅게 웃으시며 "응 어디 멀리 갔어"


사모님은 영면하시고, 혼자 오셨다는 말씀에 또 한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두해 정도 더 한국을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그 사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여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한체, 선생님을 잊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이맘때쯤

그 호텔에서 일하는 옛 동료에게 연락이 왔었다.

내 이름으로 국제 우편이 하나 왔는데, 뜯어보지는 않았고 중요한 것 같아서 와서 가져가라고.

뜯어보니 선생님께서 영면하신지 1주일 정도 되셨다는 내용과 함께

작은 십자가와 금빛으로 된 장례식 초대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사를 하고 핸드폰을 바꾸면서 선생님이 주셨던 십자가와 초대장은 잃어버렸고,

함께 찍은 사진이 몇장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내가 갖고 있는건 어떤 SNS에 올렸던 그 '로렐라이산 좋은 술' 한병의 사진 뿐이다.

지금은 뭐 그 병 조차도 갖고 있지 않으니 이제 내가 선생님과 함께 공유했던 추억의 증거는 그 사진 한장뿐이다.


이후 이맘때쯤에는 항상 그 분 생각이 나서,

이렇게라도 스스로 좋은 추억을 평생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적었다.


선생님, 다음에 다시 만나면 아쉬바흐 한잔 또 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곳에서 행복하세요.


그때 받은 아쉬바흐 브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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