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과정
낡은 LP 레코드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올려놓습니다. 바늘이 조심스레 홈에 내려앉고,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이 앨범은 제목이 없습니다. '나'라는 제목은 너무나 거창하고, '나'에게 담겨 있는 모든 과정들을 하나하나 이름 붙이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A면 첫 번째 트랙은 부모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부드러운 멜로디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아버지의 든든한 어깨는 묵직한 베이스 라인처럼 안정감을 줍니다. 때로는 삐걱거리는 음정처럼 다툼도 있었지만, 그 모든 흔적들이 이 앨범의 풍성한 사운드를 만들어냈습니다.
두 번째 트랙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풋풋한 날들입니다.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는 웃음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고, 때로는 쓸쓸한 발라드처럼 밤늦도록 나누었던 고민들도 담겨 있습니다. 그 시절의 꿈과 좌절, 기쁨과 슬픔이 하모니를 이루며 앨범의 감동을 더합니다.
B면으로 넘어가면 학교의 종소리, 선생님들의 따뜻한 가르침, 처음 느꼈던 사랑의 떨림, 그리고 좌절과 성공의 순간들이 각각의 트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각 트랙마다 다른 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지고, 때로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듯 하지만, 결국 하나의 아름다운 선율로 귀결됩니다.
마지막 트랙은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까지의 모든 과정을 담은 피날레. 그것은 웅장하고 감동적인 교향곡처럼, 온갖 소리와 감정들이 격렬하면서도 아름답게 조화를 이룹니다. 스크래치 소리처럼 거친 부분도 있지만, 그 또한 이 앨범의 역사를 증명하는 소중한 흔적입니다.
이 앨범에는 완벽한 연주는 없습니다. 실수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불완전함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빛난다고 믿습니다. 이 앨범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이 앨범에 새로운 트랙을 하나씩 추가하며,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여름밤님 안녕하세요!
편지를 주신 주간에 바로 답장할 것처럼 말씀드려놓고, 조금 늦게 나타나서 민망하기도 하네요.
P중에 가장 J인 저이지만, 이번달만큼은 완벽하게 P로 살아가면서 여러 욕심을 부리다보니 온전히 편지에 할애할 시간을 가질수가 없었어요. 즉흥적인 편지친구를 너른 마음으로 품어주시면 감사드릴게요.
지난 편지에서 여름밤님을 힘들게 했던 시기는 잘 이겨내셨는지가 먼저 궁금해지네요. 감당하기 어려운 버거움에 눈물이 흐르기도 하는 시간들 속에서, 긍정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글을 읽는 내내 여름밤님은 정말 강하고 멋진 분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답니다. 초창기 저희가 나눈 편지에서 제가 가끔은 도망가는 것도 도움이 된다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었는데, 여름밤님은 회사가 중요한 시기인만큼 높은 책임의식으로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동시에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등산을 하고 가볍게 취기도 올리며 환기까지 하시는 모습에서 저도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배울 수 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4월 한 달은 정말 오랜만에 도망을 쳐본 나날이었기 때문에 조금 더 부끄럽기도 해요.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더 뒤에 쓰도록 하고, 우선 이전 편지에 담아주신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브런치 서두에 쓴 제 글들을 좋은 인상으로 남겨주셔서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가 멈추질 않았어요. 여름밤님이 평소에 정성스레 써주시는 편지들에 비하면 소소한 수준이긴 하나, 특정 분야의 글은 다른이들의 마음에 조금 더 와닿게 쓸 수 있는 재주가 있다고 믿습니다. 투박하고 상투적인 문체는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감정을 세심하게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은 남다르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를 따로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지난 여름밤님 이야기와 같이 과거의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오타쿠' 가 있다는 것은 이제 잘 아실거라 믿어요. 한창 해당 분야에 푹 빠져있던 중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던 제작사의 팬카페 활동을 하면서 2차 창작물인 팬픽을 쓰기도 하면서 흑역사를 잔뜩 생성했던 경험이 있어요. 지금은 정말 천만다행으로 해당 카페가 폐쇄가 되면서 과거의 흔적들이 지워졌지만 당시에 열정을 갖고 어리숙하지만 계속 써내려갔던게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해당 시기에 관련한 소설책도 많이 보다보니, 그 때 봤던 문체들의 영향을 받은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 시기에 유행하던 서브컬쳐류의 소설들의 문체는 감성적이기도 하면서, 미사여구가 잔뜩 들어가서 지금의 제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겉멋이 잔뜩 들어간 글들이 많았거든요. 당시의 글을 잠깐이라도 볼 기회가 생기신다면 아마 한 번에 이해하실거라 믿어요. 조금은 민망한 고백이기도 하네요.
중학교 때 앞서 말씀드린것과 같은 열정들을 바탕으로 다독, 다작을 하면서 모양을 잡아갔다면 군생활과 여행을 통해 자신만의 필체를 얻게 됐답니다. 저는 군대에서 정훈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는데요. 일반적인 회사의 부서로 비유하자면 교육팀과 홍보팀을 혼합한 역할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거에요. 언론 보도자료를 작성하고, 장병들의 정신교육계획과 자료들을 작성하는 역할을 하면서 날것 그대로였던 제 글들이 이 시기에 조금은 무게감과 격식이 생겼다고 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립된 제 스타일이 여행을 다니며 썼던 A4 용지 500장 이상의 일기와 생각을 정리한 글들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고, 전문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허술한 부분 투성이지만 제가 아껴주지 못하면, 누구라도 사랑해줄 수 없으니 글을 쓰고 나서는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사랑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렇게 쓰고보니, 제 삶에도 이런 역사를 통해 제 삶에서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는 부분이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항상 순수하고 좋은 질문으로 멋진 영감과 생각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해요. 저희가 이렇게 주고 받는 편지들도 쌓여서 벌써 작은 책 한권 분량이 된 걸 보면, 이 편지가 이어지면서 저에게도 그리고 여름밤께도 서로의 글에 영향을 주게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제가 이미 여름밤님의 편지가 제 일상에 스며들었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죠?
벌써 일상에 녹아든 저희의 편지가 시작되었던 것이 겨울이었기에 이 과정들이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는데요. 제 인생에서 크리스마스는 성인이 된 후로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만큼,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예전만큼 다가오지 않는다는 여름밤님의 이야기에 조금은 놀라기도 했어요. 어릴적 저희집은 크리스마스의 특별함을 크게 못 느끼는 가정이기도 했고, 챙길 여유도 없었기에 그냥 평범한 휴일과 같이 지냈던 기억이 나는데요. 물론 그렇기에, 산타가 없다는 것도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알아버렸고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여름밤님과 반대로 어릴적에는 설레는 감정이 거의 없었고, 성인이 되면서 겪은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다가올수록 늘 머릿속을 멤도는 날이 되었어요.
사실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제 나이를 유추하실 수 있게 되어서 가급적 담아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동시에 제 삶의 가장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이기도 하고 예전 편지에서 크리스마스마다 치킨을 먹는 자신만의 연례행사가 있다고 말씀드린적이 있어, 담아낼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벌써 책 한권의 이야기를 주고 받은 사이에 나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게 엄청난 고민이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하기도 했고요.
어쨌거나, 큰 결심을 한 듯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실은 그렇게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니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드릴게요. 저는 대학교 갓 입학한 1학년 1학기 때 어떤 사건들을 겪게 되면서, 대학 외부 활동으로 눈을 돌리며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강박관념을 한동안 가지게 되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해당 시기에 만나게 된 활동이 '사랑의 몰래산타' 라는 봉사활동이었답니다.
서울시와 한국청소년재단이 주최하는 봉사활동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저소득층 꼬마 친구들을 찾아가서 산타 이벤트를 해주는 활동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보다 편하실 것 같아요. 처음에는 봉사시간을 쌓고, 스펙을 쌓는 용도로 해야겠다고 신청했던 이 활동이 향후 10년간 이어지며, 제 삶의 큰 영향을 주게 될거라곤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도 못했어요. 봉사내용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주는 간단한 이벤트였지만, 이 활동을 준비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과 만나게 된 마음 한 가득 온정을 품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보며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이 교차했어요. 스펙이라는 어떻게 보면 약간은 불순한 의도였지만, 진심을 다해서 활동하시는 분들께 저도 동화되어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을 준비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활동 당일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간 아이들 앞에서 저는 산타분장을 하고, 같은 팀원들의 바람잡이 뒤에 아이들 앞에 나타났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당시 나이로 5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였어요. 제가 나타나자마자 귀여운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낯선 이에 대한 두려움 반, 진짜 산타를 봤다는 호기심 반이 섞인 아이의 표정에서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따뜻한 웃음이 나왔어요. 이 친구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가정에서 자라면서, 아버지가 일로 외부에 계속 나가있게 되어 사살상 할머님과 둘 만 사는 친구였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벤트의 막바지에 케이크에 초를 불며 소원을 비는 순서가 있었어요. 그 순간에 눈꺼풀이 떨릴 정도로 두 눈을 꼬옥 감고, 소원을 비는데 어떤 소원일까 궁금했어요. 그러던 중 할머니가 어떤 소원을 빌었냐고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엄마..." 라는 두 글자를 끝으로 말을 흐리던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아마 소원을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말을 끝까지 못한게 아닐까 싶어요. 저 한 단어만 들어도, 아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진심어린 소원이라는게 느껴질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말을 흐리고 나서도 저희를 향해 그 상황이 낯설기 때문에 조금 두렵긴 하지만, 세상 가장 환한 미소로 웃어줬던게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그 순간, 아이들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시작했던 활동이 결국엔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따뜻한 미소로 그간 있었던 여러 일들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한 순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다음해에도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큰 힘을 받은 그 기분과 아이들의 순수한 그 웃음을 잃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 이어져 10년 동안 크리스마스가 되면 봉사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리고 항상 활동이 끝나면, 추운 날씨에도 불평이나 힘든 내색 없이 끝까지 밝은 기운을 가득 안은채 함께 했던 분들과 치킨을 먹으며 마무리 했던 기억 때문에 치킨을 먹는 습관도 생겼고 말이죠. 중간에 2년간 긴 여행을 다니며, 활동을 못했던 기간도 있지만 이 때도 후원을 계속할 정도로 제겐 큰 의미가 있는 경험이었어요. 30대가 되고, 이런저런 생각 정리 끝에 몰래산타 활동은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게 된지 조금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 날들을 떠올릴 때면 따뜻함을 선물 받는 듯한 소중한 선물이 되었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흥분해버리고 만 것 같네요. 아직 여름밤님께 쓰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인 오늘인데... 편지가 아마 많이 길어질 것 같네요. 저는 피치를 올렸지만, 여름밤님께서는 조금 더 차분하고 고운 호흡으로 편지를 따라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선 경험은 제가 여행지에서 겪었던 일과 그를 통해 들게 된 생각들과 결부되어, 아이들이 행복한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라는 가치관까지 연결될 수 있었어요. 특히, 편지에서 물어보셨던 마니까르니까 가트가 있는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이 생각이 더 굳어지기도 했어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고 또 피할 수 없는게 죽음이라는 것이지만, 그 끝을 보내는 방식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너무나도 달랐어요. 그렇기에, 그 뿌리가 되는 차별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여러 사람들을 병들고 힘들게 하는 것이 눈에 보였고, 특히 동냥을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조차 평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 모습들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렸던 죽음 앞에서 유일한 평등은 잊혀지는 순간, 진정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이고 말이죠. 그래서, 여름밤님의 답장에서 '코코'라는 영화를 소개 받고 제 생각과 비슷하다는 말에 바로 보게 되었는데요. 정말 명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멋진 내용과 구성들이었어요. 말씀주신바와 같이 코코에서 나오는 죽음에 대한 시선이 제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고 보셔도 무방할 것 같아요. 좋은 영화를 소개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고 받은 편지 속에서 여러 편의 영화와 책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항상 드는 생각이 좋은 소재를 적재적소에 소개해주시는 재능이 있으신것 같아 매번 감탄하게 된답니다. 불안을 이기는 철학부터 러브레터, 코코까지 소개해주셨던 친구들을 하나씩 소화해가면서, 제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주 이야기하던 영화같은 주제부터 새로운 이야깃거리까지 여름밤님의 선택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편하게 앞으로 많이 소개 부탁드릴게요. 이러한 콘텐츠들이 모여, 서로를 모르는 우리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잊혀지지 않도록 서로를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가 쌓인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인생 앞에서 자주 부서지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실금이 가더라도 테이프로 붙이고 어느 정도 큰 덩어리가 깨질때까지 버티는 저와는 결이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여름밤님을 보면서, 앞서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그리도 멋진 회복탄력성과 단단한 내면을 가졌는지 늘 감탄을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여름밤님이 소개해주시는 콘텐츠들은 조금 더 관심과 시선이 가게 되는 것만 같네요. 사실 제가 누구 어떤걸 소개해주더라도, 제가 크게 감흥이 없으면 본다는 채만하고 조용히 넘어가 버리는 경우도 조금 있었기에, 여름밤님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 항상 감탄하게 됩니다. 편지를 주고 받을 때마다 한 걸음씩 더 나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와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여름밤님의 말씀처럼 예전부터 겹겹이 쌓아 올려진 제 모습에 여름밤님과 소중한 주위 사람들에게 받아 올린 긍정적인 영향을 토대로 쉽게 뽑아 낼 수 없는 단단한 뿌리를 가진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사실 이번 4월은 열심히 도망쳐 다녔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제가 크로스핏 대회 이후로 부상과 이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 때문에 20일 가까이 회원권을 홀딩을 시켰었습니다. 운동이 갑자기 재미가 없어진게 가장 큰 이유긴 했는데요. 지금 다니고 있는 이 체육관의 운동 루틴에 권태를 느낀건지 아니면 크로스핏이라는 운동 자체가 이제 제 인생에 큰 동력이 안되는건가 하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홀딩 기간 동안, 다른 체육관을 다녀볼까 생각하던 찰나 지인의 제안으로 러닝 마일리지라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고, 월에 200KM를 뛰는 도전을 시작했어요. 혼자 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단체에서 진행하는 것을 함께 수행하며 조금 더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과감하게 시작한 것도 있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러닝은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았고, 생각만큼 재밌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즐겁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크로스핏을 열심히 한 기간이 있다보니, 생각보다 제 체력이 많이 올라와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고요. 편지를 드리는 4월 21일 오늘까지 142KM를 뛰어서, 남은 기간 동안 충분히 200KM를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라서 운동에 대한 권태기를 극복하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번 챌린지를 하면서 처음으로 하프 마라톤도 뛰어봤는데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어떻게 뛰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부딪치고 보니 할만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스스로를 과소평가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 생각까지도 들었고 말이죠. 물론 인생은 그런 생각에 겸손함을 가지라는 듯, 회사에 이슈가 생기면서 야근을 밥먹듯이 하게 되었고, 챌린지 때문에 늦은 시간에 뛰면서 제 체력을 테스트하긴 했지만요. 그럼에도 주변의 소중함을 잃지 않고자, 친구의 프로포즈를 도와주고, 양양으로 촌캉스도 다녀오고 여러모로 바쁜 일상을 보냈어요. 그리고 크로스핏 홀딩 기간이 다 지나고나서, 체육관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나서 든 생각이, 인생에서 주객전도가 이런 저런 순간에 여러 이유로 일어나곤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 운동이 재미없게 된 순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제가 먼저 찾아서 했던 여러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처음에 크로스핏을 시작할 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정말 재미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더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대회 이후로는 주변에서 같이 운동하는 분들과 코치님께서 더욱 잘해야 한다는 말을 지속적으로 하셨고, 그 말들에 더 이상 크로스핏을 즐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잘하지 않기 때문에 재미가 없다로 바뀌어버리고 만 것이죠. 재미가 있어서 잘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 버린거라는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제 생각을 조금 달리해서, 운동을 순수하게 취미로 즐겁게 다가가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과거에 느꼈던, 그러면서 쌓아왔던 제 즐거움은 거짓이 아니었으니까요. 이제 주변의 시선이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제가 좋아하는 것을 제가 원하는 속도로 편한 마음을 갖고 가기로 결정한 만큼, 이전보다는 조금 천천히 나아가보고자 합니다.
연초에 나누었던 목표 중에 크로스핏 관련된 항목들은 어쩌면 올해 안에 이룰 수 없게될지 모르지만, 결과가 아닌 과정과 제가 하는 이 운동을 하는 목적에 시선을 옮기며, 제 삶을 건강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 운동과 함께 가려고 합니다. 속도는 조금 더뎌졌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걸 꼭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이 여정을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혹시, 저와 같이 올해 세웠던 목표나 일상에서 겪은 어떤 일들로 생긴 생각의 변화 같은게 있으면 공유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기회가 될거라고 믿어요.
4월 중순부터 다시 회사일을 포함한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지신다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부디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과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그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로운 나날이 되시면 좋겠습니다.(제가 좋아하는 구절이지만, 저는 조용한 종교시설 자체만 좋아하는 무교입니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낮밤으로 온도차가 극심한 나날이네요. 이번에는 지독한 고뿔이 여름밤님을 괴롭히지 않고, 평온하게 지나가기를 기원할게요. 지난 편지에서 벚꽃이 피고 있다고 말씀주셨는데, 어느덧 길가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나무들은 생긋한 초록의 녹음이 눈가에서 아른한 아지랑이를 피우고 있네요. 마음과 몸 건강 모두 유념하시고, 다음 편지 때 기쁜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혹여나 이번 편지가 너무 길어서 길게 답장해야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신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마음만 꾹 눌러담아주셔서 짧게 찾아오셔도 괜찮습니다. 언제나 편하게 찾아와주세요.
P.S 저도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지난 주말에 참여했던 잠실 롯데타워 계단 오르기 대회 기록 사진이에요! 3년 전 운동도 하지 않고, 살이 엄청 쪘을때보다 10분 넘게 단축을 해서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과거의 자신을 이겨내는 것만큼 짜릿한 경험도 없을거에요.
그리고 여름밤님의 발레 소식도 궁금하네요. 이전 편지에서 킥복싱을 마무리하고, 발레로 넘어가는 고민을 하고 계시던게 기억이 났어요!
25. 04. 21, 테드로부터